영화 <윤희에게>, 2019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무엇이든 더는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어떤 이야기는, 그 안에 놓인 슬픔이 오롯이 당사자들만의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온전해진다. 세상에는 내가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래서 ‘세상에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을 쓸 때면 부끄러워지는 것일 테다. 언어로도 채 안 담기는 소외된 존재들의 고통 앞에 놓인 안일한 내 모습에 무연해질 때 <윤희에게>는 마치 그 막막함 가운데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으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윤희의 딸 새봄이 편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을 때, 괜히 떼를 쓰듯 일본 여행을 가자고 말할 때, 윤희와 쥰이 만나는 순간 돌아서서 달을 보며 걷기 시작할 때, 그들의 아픔을 그들만의 것으로 놓아두는 새봄의 마음이 그곳에 있음을 감각할 수 있다. 그 조심스러움과 사려로부터, 타자의 아픔에 대해 외부인인 우리가 다할 수 있는 최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계기와 실마리를 동시에 발견해 나갈 수 있다.
마사코(쥰의 고모)가 몰래 부치지 않았다면 결코 윤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쥰의 편지 속에는 짤막한 인사 뒤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무엇이든 더는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쥰이 건넨 이 말은 두 사람이 그들의 존재를 부정당했던 20여 년 전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문장은 단순히 흔히 비밀로 치부되기 쉬운 어떤 과거를 직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는 것에 그 목적성이 놓여있는 선언에 가까울 것이다.
오래된, 그러나 생생한 그들의 아픔에 분명한 맺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두 사람은 침묵의 시간을 깨고 나와 내면을 치유하기 위한 걸음을 뗄 추동력을 얻는다. 그 과정을, 이 여정의 필요성을 함께 목격한 관객은 침묵을 선언으로 바꾸기 위한 두 사람의 만남을 간절한 마음으로 조용히 좇게 된다. 그 여정이 이루어진 오타루 여행 이후, 남은 여분의 삶이 벌(罰)이라고 생각했던 윤희는 자신이 부여한 벌을 스스로 거두기로 결심한다. 존재성을 부정당했던 과거를 과거에 남겨두고 그 시간을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 나아가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 이처럼 치유 끝에 도달한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를 내면화한 후 ‘벌’이 아닌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는 윤희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치유의 필요성을 발견하게 한다.
윤희 앞으로 도착한 편지로부터 시작한 이 영화는 윤희가 직접 쓰는 편지로 닫힌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그저 버티기만 하던 형벌 같은 삶이 아닌 진짜 자신의 삶을 살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는 결국 여느 때보다도 빠르게 많은 사람과 접속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느낄 어떤 막막함을 위한 사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어떤 상처와 슬픔에 있어서 분명히 외부인일 우리가 취해야 할, 또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되어주는 시공간이다.
결국 <윤희에게>는, 대부분의 고통 앞에서 그저 타자일 뿐인 우리 모두의 무연함을 위한 한 통의 편지인 셈이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