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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리 Feb 20. 2022

고통이 곧 글감이라면

습관적 절망의 결말을 기다리며 하는 일


우리의 고통이 우리에게 작은 상흔
그 이상은 남기지 않고 지나가기를


  최근에 한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금 촌스럽게 들릴까 싶어 망설임을 살짝 곁들여서, 나에게는 아주 최근에 생긴 좌우명이 있으며 그건 다음과 같다고. '고통은 또 하나의 새로운 글감일 뿐이다.' 참 낙관적이라고 볼 수도, 어쩌면 굉장히 회의적인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 바람으로는 조금 근사하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라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마음 아픈 일들을 이야깃거리 삼아 가볍게 넘기는 사람이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게 아니다. 혹은 고통은 모두에게 아주 흔한 일이며 유난 떨지 말라고 감히 충고하고 싶지도 않다. 그 대신, 제목에도 놓여있는 저 문장은 어쩌면 사실 주문이나 확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필연적으로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것들, 이를테면 절망과 우울, 불안, 고독과 같은 고통들이 마치 하나의 글감처럼 무언가 적당히 견딜만한 것이기를 바라는.


  절망이 습관처럼 느껴지는 날이 종종 있었다. 표현이 생경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도 어쩌면 경험한 적 있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삶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고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해결될 기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당신은 한 시름 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숨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새롭게 우려할 것이 삶의 한 귀퉁이에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가 익숙하다면, 내가 '습관적 절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심각한 절망을 경험하기 시작한 나이(따돌림을 경험했던 13살)부터는 계속해서 그래 왔던 것 같다. 당장 끌어안고 있는 절망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 그게 해결되거나 혹은 그것에 적응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또 새로운 걱정거리를 금세 찾아냈다. 그런 식으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잔뜩 휘청이면서 계속 불안하게 지내왔다. 크게 반응하고 많이 흔들리면서. 그러다가 내가 만난 것이 '쓰는 행위'였다.


  잠시만, 또 글을 쓰라고 독촉하고 싶은 게 아니다. (모두에게 글쓰기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거나 오만한 사람은 아니므로.) 어른 비슷하게 되어가는 중인 지금의 나에게 고통이라는 것이 써 내려갈 하나의 글감이 된다면, 당신에게는 운동을 할 계기가 될 수도, 새로운 식물을 들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그런 작은 방패가 하나씩은 필요해질 테니 그걸 마련해두자는 말이다.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끊임없이 매번 다른 모양을 한 갖가지 고통을 마주하게 될 테고, 어쩌면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직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삶은 결국 갈수록 그 아픔을 잘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아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더라도 완전히 소화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는, 조금 슬프지만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예감과 함께 말이다.


  한때 꽤나 좋아했던 일본 밴드 SEKAI NO OWARI의 노래 중에 Mr.Heartache라는 곡이 있다. 영어 노래니 언어 장벽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기를. 혹시나 어느 친절한 독자께서 이 노래를 찾아 듣게 된다면 예상을 뛰어넘는 신나는 멜로디에 놀라실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곡 이야기를 꺼낸 건 가사 때문인데, 그 이유가 무색하게도 가사의 대부분이 'Hello again, Mr.Heartache.'라는 반복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가사 속 화자는 마음 아픈 일이 찾아오면 "어, 또 왔어?"하고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오히려 반가운 듯이 인사를 건네고 있. 나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올 만큼 퍽 놀랍다고 여긴 동시에 어쩌면 그런 게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담담함이, 또 용기 있는 수용이 우리가 앞으로 찾아낼 자신만의 작은 방패로부터 얻어낼 무언가라고도.


 여러분에게 많이 낯설 것이 분명한 외국 곡까지 끌어오는 바람에 조금 거창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의 고통이 우리에게 작은 상흔 그 이상은 남기지 않고 지나가기를, 그리고 이내 그 익숙하고 어두운 것들을 우리 모두가 조금은 무디게 넘길 수 있게 되기를 조용히 소망한다고. 그러니까 한번 탐험해보시기를 바란다. Mr.Heartache를 만나면 건넬 당신만의 인사말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아직 남은 살 날들은 많고, 이왕이면 옷이 젖을 걸 알아도 기꺼이 파도에 올라타는 순간들로 그날들을 채워가는 것이 근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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