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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훈 May 19. 2024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


가까운 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 하는 활동들을 너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라고. 이전까지 몰랐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원해서 했던 경험도, 그다지 원하지 않던 경험도 모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갈 수 있는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등을 조금씩이나마 알아갈 수 있었다.  


예부터 어른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다양한 경험'도 결국엔 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삶이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일 테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잘 사는 것'이며 탈세속적 의미로서의 '성공'이지 않을까?  


대학교 1, 2학년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온 기자라는 직업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 교내 학보사에 들어갔었다. 그 당시, 나는 기자야말로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 생각했다.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사회에 빛이 되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2년 동안 대학 기자 생활을 하고, 언론 관련 수업을 들으며, 기자가 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경험들은 기자라는 직업을 더 이상 희망하지 않는 계기가 됐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자는 내가 생각한 이상과는 다른 직업이었으며, 성격과도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 경험 덕분에 기자를 더 이상 희망하지 않게 되었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적성을 찾아나갈 수 있었다. 학보사 경험이 아니었다면,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이 나의 비전이자 꿈이라 여기며 계속해서 전진했을 것이다. 단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것보단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최근 인턴을 하면서도 경험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고 있다. 나는 시골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서울을 동경해 왔다. 어릴 적 텔레비전과 뉴스를 통해 바라본 서울은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였고 강원도는 연못에 불과했다. 나는 기왕이면 연못보단 드넓은 서울에서 헤엄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매스컴의 편협함이 나에게도 스며들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인턴으로 광화문에 위치한 언론사에 들어갔다. 동경해왔던 서울에서의 생활이지만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금방 절감했다. 1시간 반 동안 숨 막히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광화문역에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퇴근을 하면 다시 같은 지하철을 타고 긴 시간을 가야 했다. 사람들은 고통을 잊기 위함인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유튜브와 쇼츠에 빠져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의 세상과 매트릭스 속 세상이 점차 일치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로 가득한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숨을 내쉬는 일만큼이나 일상적인 것이었다. 누군가 나의 발을 밟아도,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러도 그건 그저 서울살이의 평범한 한 조각일 뿐이었다. 


고작 몇 개월 동안 그런 삶을 살자, 나는 여유가 사라지고 점차 옹졸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운 좋게 앞에 빈자리가 나서 앉으려고 하는 순간, 야비하게 그 자리를 쏙 차지하던 남성이 미웠다. 덩치가 크면서도 어깨를 좁히지 않는 옆자리 남성이 미웠다. 옆 사람과 큰 목소리로 떠드는 할아버지들이 미웠다. 


이대로면 나는 더욱더 못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동경해 왔던 서울은 더 이상 나의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결국 나는 지구에 뿌리내리지 못한 외계인처럼 다시 여유를 찾아 지방, 혹은 다른 곳을 찾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실패나 하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 성공, 멋짐을 따라간다고 해서 무조건 잘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겐 서울의 삶이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모양과 색깔이 모두 다른 개인들은 각자에게 맞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토록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과 적성은 달랐던 것처럼, 멋져 보였던 광화문으로의 출퇴근이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던 것처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점차 알아가는 것. 삶에선 그런 과정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내면 그 또한 경험과 자산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흔들림과 불확실함 속에서 나를 계속해서 찾아가다 보면, 나에게로 이르는 삶, 그리하여 인생의 어느 순간 돌이켜봤을 때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되어있지 않을까?


나로 태어나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의 모양으로 살아가는 것. 쉬워 보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에게로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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