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행위다. 디지털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쉽게 사진을 촬영하고 흘러가는 사소한 찰나의 순간을 스마트폰의 메모리 속에 반영구적으로 남긴다. 사람들은 먹는 것부터 지금 하고 있는 것까지 모든 순간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이 행위의 기저에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나 자신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지금에야 사진을 찍는 것이 간편해져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말이 나왔겠지만 디지털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는 “남는 것은 메모뿐”이라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을 통한 기록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 온 인생을 다하여 삶과 사람을 기록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뉴욕과 시카고 등지의 20세기 거리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숨겨온 베일의 감춰진 사진작가다. 그녀는 미국 뉴욕에서 출생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여러 가정에서 보모 일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마이어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조차 ‘모순적이다’, ‘신비롭다’, ‘유별나다’ 등의 단어로 그녀를 정의한다. 이름을 써야 하는 곳에서조차 그녀는 ‘Smith’ 혹은 ‘V. Smith’ 등의 가명을 썼다. 자신의 이름조차 다른 이에게 알려주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남자 셔츠를 흔히 입었으며 키는 대략 175cm로 걷는 모습이 마치 ‘50년대 공장 노동자’, ‘나치들의 행진’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마이어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2007년 겨울, 존 말루프는 논문에 쓸 옛날 사진이 필요해 경매장에서 필름을 구매했다. 그리고 이를 스캔해 블로그에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본 사람들은 감탄했다. 이윽고 그는 나머지 작품들을 모았다. 경매장에서 나머지 필름들을 구매해 자료들을 정리해가며 작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그녀는 수집광이었다. 마이어가 보모로 일하던 가정의 창고에는 그녀가 살면서 모은 신발, 모자, 쿠폰, 전단지, 버스표 등 엄청난 양의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말루프는 그것들을 하나 둘 정리해가며 그녀의 삶을 뒤쫓았다.
마이어는 이모할머니의 유산으로 카메라를 구입했다. 가장 먼저 구매한 카메라는 비교적 저렴하고 대중적이었던 코닥 브라우니 박스 카메라다. 이후로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했다. 비비안 마이어는 언제나 거리에 나가 사진을 찍곤 했다. 때문에 상당수의 작품들이 거리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특히 그녀의 출생지인 뉴욕, 그리고 시카고의 모습이 많이 담겨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포착한 사진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마이어에 의해 그저 개인의 일상 속 순간이 찰나의 역할극으로 편입된다. 그 순간 피사체는 배역이 되고 비비안 마이어는 연출자로 변모한다.
그녀는 도시를 거닐며 시선을 끄는 얼굴들을 촬영했다. 인종, 계층, 성별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이어의 사진에서만큼은 다양한 얼굴들이 평등하게 자리한다. 그녀는 타자의 얼굴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도 찍었다. 셀피의 원조 격인 것이다. 마이어는 자신이 마주치는 상황에 따라 다채롭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촬영했다. 도시의 반사되는 물체들을 흔히 이용했으며 거울, 그림자 등 어딘가에 우연히 비친 자신을 찍었다.
때론 미시적인 것이 거시적인 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비비안 마이어는 피사체의 전체를 보여주기보단 부분을 포착함으로써 나머지 부분들을 오롯이 상상에 맡기게 한다. 그녀의 작품들 중 흑백 사진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관찰자 시선에 위치하지만 컬러 작품들은 감성적이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부분과 전체, 흑백과 컬러, 자신과 타자 등 그녀가 거리를 다니고 세계를 넘나들며 무수하게 찍은 사진들은 그녀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과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다채롭게 담겨있다. 처연하게, 아름답게, 날카롭게 찍어대는 그녀의 사진들은 지나온 적 없는 20세기의 나날들을 마주하게 만든다.
마이어의 작품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일관적이지 않다. 울고 있는 아이들이 있고, 험상궂은 표정의 아저씨가 있다. 다부지게 팔짱을 끼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꼬질꼬질 한 아이가 있으며 살며시 잡은 남녀의 두 손이 있다. 그리고 반사된 자신을 바라보는 무표정한 비비안 마이어가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정동이 담겨있다. 우리는 그녀가 포착한 이 정동들을 바라보며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보모였던 마이어가 왜 사진을 찍게 됐는지, 그리고 사진들을 왜 세상에 보여주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온 인생을 바쳐 기록하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단지 추측해 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 또한 행위가 오랜 기간 반복되다 보면 그 이유를 쉽게 망각한 채 살아가곤 한다.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를 향한 ‘왜?’라는 질문의 화살표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