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꿈

by hari

표정이 글이 되는 사람이 좋다 짐작할 수 있고 즉물적이다 그의 얼굴에 회화를 입힐 수 있다

다섯 걸음을 뛰다가 세 걸음으로 줄였다 덧셈이 지겨워 다섯 걸음을 뛰었는데 너무 많이 뛰어서 세 걸음으로 줄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책에 어느 사람 또한 세 걸음을 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닮고 닮지 않아도 닮는다

분간할 수 없는 글에는 노고가 읽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에는 순수가 담겨있다 자신이 아는 얕은 사전은 허영이 들어있다 어느 허영은 지독하게 역겹고 어느 허영은 뻔뻔스럽게 매력적이다 나는 얕은 사전조차 만들지 않는 허영을 사랑했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는 가장 순수한 허영을 가졌다 나는 그의 얼굴을 잊었고 그의 넓적한 귀를 기억했다

아무도 기억해낼 수 없는 얼굴을 지녔다 눈은 텁텁한 앞머리로 가려있었고 코는 넓적해 기억나지도 않는다 입의 촉감조차 없었으며 나는 항상 그의 귀에 달려있던 귀걸이를 보았다 갑자기 짧아진 머리에 낯설어 소리를 질렀고 며칠 뒤 그의 가족에게 전화가 왔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린 아이의 꿈을 꾸었다 내가 가장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학창시절을 만들어냈다

나는 누구와도 영화를 보지 않는다 누구와 함께 보는 영화는 역하다 줄곧 나는 혼자 있는 영화관에서 그의 귀를 만지곤 했다 벌러덩 엎어져 다리를 들곤 했다 어린 아이의 다리 같았다 부드럽지 않았고 목각인형으로 만들어진 아이였다 나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의 앞에서 음악을 들었고 금요일마다 죽었다 그는 항상 내가 다른 이와 다리를 벌리는 줄 알았고 나는 순결했지만 음탕했다

가지기 싫었던 기억을 가졌고 가지고 싶은 기억은 잃었다 줄곧 내가 하는 실연(實演)들은 그랬다

가해자를 사랑했고 피해자를 증오했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가해자의 손에 묻은 피는 누구보다 순수하다 그들은 손에 묻은 피를 흰 수건으로 닦고 그것을 아무 곳에나 던져버린다 피해자는 검붉은 수건에 피를 닦은 뒤 벽의 깊숙한 속에 숨겨놓곤 한다 그들은 그것을 밤에 몰래 보며 울곤 하였다

공들여 만든 것의 완성품은 산산조각 내버려야 가장 슬프지 않다 아플까 천천히 죽여 버리는 행위는 가장 잔인한 것이다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가장 즉각적으로 죽여 버리곤 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이를 숨통이 막히기 전까지 쑤신 뒤 죽이지 않았다 가끔 술에 취해서 내가 사랑한 이를 죽이지 않은 적이 있다 그때 그린 그림을 보면 눈에서 나와야 할 눈물이 밑에서 나왔다 내 몸도 감정을 헷갈리나보다 밤에 통화해서 들은 목소리가 눈에 차다 차가운 만큼 뜨겁고 뜨거운 만큼 쉽게 식었다 나는 지금 냉각중이다 가장 뜨거울 때 하는 냉각이 가장 탱탱하다

가지고 싶어 몇 년 간 희망했던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을 때 그것을 증오하게 되는 기억이 있는가? 나는 그것의 기억조차 잃고 싶다는 탐욕에 망각을 시도했다 다른 공간을 그것 앞에 보여주었을 때에는 혼동 이었다 질투도 슬픔도 화도 아닌 당황스러움 이었다 각막에서 실오라기 하나 보이지 않았고 그저 메스꺼워서 버스에 앉아 혼자 엎어져 잠에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사지가 들썩였다 부드러운 다리가 사라졌다

나는 공간을 만들었다 항상 아버지가 두 명이었고 나의 공간 속 아버지는 한 명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지 않았고 心의 감각으로 서로를 안곤 하였다 그 사람과의 장소가 없다고 안도했을 때에 우리는 이층의 테라스에 앉아 우울에 대하여 말하였고 그는 나의 우울의 표면이었다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곤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항상 내가 제정신 아닌 말로 지껄여도 나를 가장 순수한 정신병자로 알아주었다 나는 나의 순수하고 연약한 마음을 즐기곤 하였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은 내 이미지를 훔치기 시작했고 다시는 그 사람을 비현실에서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것이 그를 가진 셈이고 그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아무런 꿈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있어도 항상 혼자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뚜렷하고 생생하다

참고 있어야 하는 언어를 항상 흘려보내는 버릇이 있다 그것이 내 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세상을 떠나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가장 짙은 세상 속에 있는 내 모습이 상상가질 않는다 몇 달 전 며칠 동안은 내가 죽어있었다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불 속에서 입이 막힌 채 고함지르며 죽어있었다 나는 항상 불이 무서워 전기코드를 다 빼고 잠에 든다

사람들은 가끔 슬프면서 행복한 글을 보며 어둡다고 하고 나약한 밝음에 열광 한다 나는 슬픔과 나약함을 사랑하고 때때로 그 두 개 다 놓쳐버린 척 하고 살고 싶다 매일 마시는 진토닉을 시켜서 한 모금도 대지 않고 취한 척 하고 싶다

세 시간 동안 정리해야 할 것들을 한 시간 동안 정리했다 집정리란 기억까지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기억을 정리하면서 기억이 점점 더 크게 각인 된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말이 많아졌다 어제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정리만 했다 가득하게 쌓여진 책을 보며 나의 꿈이 생겼다 목표 없는 꿈이 담백하다

만족하는 순간 끝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느낀다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는 형상의 느낌 말고 감각의 느낌으로 허영심까지 느끼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써야 되는 글 말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단 한 글자라도 내 마음과 이미지가 담겼으면 좋겠다

내가 꾸는 꿈이 한 개 늘어났다 꿈을 줄이고 있다가도 오늘 아침에 갑자기 추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건대입구역으로 가는 낯익은 길에서 싸구려 책꽂이를 이만 팔천 원 주고 샀는데 보잘것없는 벽에 기대어 놓으니 그것이 내 꿈이 되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한 번 씩 꼭 보게 된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불안정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책으로 네 개의 벽면을 막아놓고 그 가운데에서 책들을 보며 잠에 들고 싶다 때때로 악몽도 꾸고 때때로 행복한 자위를 해도 그 책으로 가려져 있어서 두려울 것은 없다 그것이 내 꿈이다

공간에 대한 집착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어제 오빠에게 우리의 공간을 만들자고 한 나의 말에 즐거워서 눈물이 튕겨져 나올 뻔 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는 현재였는데 어제는 지극히 과거의 나약한 내가 나왔다 때때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항상 나의 감정을 사랑했다 즐거워서 펑펑 울부짖고 싶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오고 싶다 너무 말끔하게 버려진 것들이 가장 두렵다 가장 커다란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 같아 그것을 훔치는 느낌이 든다 어느 날 이층에서 그 아이를 만났을 때 나는 의미를 상실하고 싶어졌고 그냥 그냥 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어졌다 그 아이는 의미가 없는 물건을 주워오곤 한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꿈을 꾸는 것도 좋다

가장 어이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가 있다 상대가 나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더라도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연약한 소망이다

즐거운 생각을 하며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나는 그 사람을 잡고 있지만 잡는지 모르고 즐기고 있고 슬퍼하며 잡고자 하면 놓쳐버린다 나의 꿈은 항상 연약하면서 아름다웠다

꿈을 물어보면 목표를 말하고 목표를 물어보면 돈을 말했다 현실 속 인간들은 그랬고 나도 현실을 살고 있다가 비현실의 과거가 그리웠다 지금은 꿈을 꾸고 있고 때때로 사람들은 특별해지고 싶어서 자기 자신을 또라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는 어느 누구도 측정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한계는 나에게 가장 커다란 위로다

제일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인간임을 확인하면 따뜻한 차가움이 느껴진다

경리단 길에 있는 렉서스 앞에서 쭈그려서 눈물 흘리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표정으로 울고 있었고 잔잔한 취기가 있었다 다음날 깨어나면 후회하는 감정 같으면서도 타인의 품을 갈구하는 개인 같았다 나는 관찰자였지만 안으로 이미 여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꿈의 사람과 현실의 사람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구와 싸우지 말아야지 하는 방어가 먼저 나왔기에 꿈의 사람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꿈의 이야기를 해도 오빠와 언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의 추억은 그들 자신이었으며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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