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사실 샴푸가 떨어져서 샀어야 했는데, 매일 까먹고는 마트가 문 닫을 시간에 집에 돌아와서 사지도 못하고 비누로 머리를 약 4일 동안 감았던 것 같다. 정말 뻑뻑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샴푸를 사야 한다는 걸 잊었다. 그러다가 샴푸를 샀다. 오늘 샴푸로 머리를 감는데 이렇게 개운할수가! 하며 엄청 행복하게 머리를 감았다고 한다.
*
요즘엔 내가 많이 비우려고 한다. 비우는 여러 방식 중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흘려버리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기분이 아무리 좋아도 흘려버려야 하는 감정은 있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생각했을 때, 꼬리를 물고 나에게 질문하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마음 속 가치였고, 그중에 으뜸은 사랑과 평화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물건 지위 혹은 꿈도 대부분 사랑과 평화와 맞물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불안과 두려움, 욕심 등을 인정하고 흘려보내고 있다.
*
신기하게도 이렇게 아무 욕심 없고 이기심 없이 행동으로 이어지니 내가 사람들을 대부분 다 사랑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하니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저것 많이 주시고 고맙다고까지 한다. 얼떨결에 많은 것들을 받아먹었고, 칭찬을 받았기는 했지만 나는 대체 내가 무얼했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단지 비웠을 뿐, 한 건 없는데 말이다.
*
비움 안에는 정말로 사랑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압도당하는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에 가까운 잔잔한 사랑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엄청 엄청 엄청 맑기보다는 조금 티끌이 있는 상태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태가 좋은 것 같다. 계속해서 0이 될 때까지 끝없이 비웠으면 좋겠다.
*
전시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감일이었다.
개인전을 할 때마다 러프하게 기획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단순하고 단조로운 방식으로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런 깔끔한 디피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관장님이 사람이 많이 안 와서 걱정해주셨지만, 사실 항상 개인전을 할 때마다 그저 내 지인분들만 오셨어서 낯선 분들이 오시는 것 자체가 나에겐 정말로 특별한 전시였다. 지인분들이 찾아오셨던 것도 너무 감사했고 낯선 분들이 꼼꼼히 관람해주신 것도 너무 감사했다.
하루에 10명 정도씩 왔던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특별했다. 숫자는 상관이 없었다. 한 사람이 나에게 주었던 따뜻한 말들이나 혹은 소소한 선물들이 나에게 크게나마 다가왔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너무 감사해서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달까.
처음 뵌 관장님은 보자마자 좀 놀랐던 것 생각보다 젊으셨고 뭔가 진지하시지만 안에 따뜻함이 있어보이셨다. 그리고 자기 관리를 잘 하시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뚝뚝하시지만 소소하게 챙겨주셔서 감사했고, 별 탈 없이 전시를 마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너무 행복한 이주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오셔서 놀랐기도 했고, 사실 내 생일선물로 나에게 주는 전시야! 하며 했던 전시였는데,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 이 이주가 앞으로의 나날에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내가 팬인 예술하시는 분들도 오셨고, 나는 아직도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
무언갈 열망하기 전에 비우는 게 최우선인 것 같다. 진짜 요즘의 내 최고의 관심사가 비움과 집착 없는 마음이다.
비워진 상태에서 후추 뿌리듯 소망을 한 움큼 뿌린 다음 잊어버리면 정말 빠른 시일 안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니면 그것도 없애고 단지 비우기만 해도 좋은 것들이 알아서 오는 것 같다. 물질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말이다.
물질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정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음을 누구에게 주는 것 같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되는지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족인 것 같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돈을 모으고 인정을 받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진짜로 누군갈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가난하든 부자이든, 어떤 조건이 있든 정말 덧없이 소용없게 그저 벌거벗은 깔끔한 존재 상태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상태의 사랑이 제일 좋다.
*
생각은 어떻게든 읽힌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을 인지하면 털어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언젠간 그 사람의 생각을 읽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다. 조금 더 예민하고 깨어있는 사람일 수록 그것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면을 쓰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행동 자체는 언젠간 생각이라는 에너지로 다른 이에게 깨달음을 주고, 그 사람의 행동을 오해하거나 혹은 상황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100% 진실은 그 생각을 한 사람에게 있겠지만, 여하튼 이런 측면에서 진심은 통한다. 진심은 생각이나 자기 이기심이나 이익이 필요 없이 정말 진심이기 때문에 읽히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진다. 그 마음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무엇인가를 진정하는 사랑의 마음은 어떻게든 느껴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수록 다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다시 사랑으로 보답하게 되어있다. 요즘에 내가 소소하게 느끼고 있는 것들인 것 같다.
세리가 전시실에 왔었는데 가끔 세리를 보면 우리 엄마같기도 하다. 그런데 웃긴 건 5살짜리 엄마같다. 그만큼 순수하게 세상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느낌이 들어서 가끔은 웃겨서 속으로만 웃는다. 세리가 어렸을 때부터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갑자기 내 전시실에 오자마자 감성이 터진 세리를 보자마자 너무 귀여워서 ㅋㅋㅋㅋㅋㅋ 참 좋았다.
“너 자신을 행복하게 그냥..둬..” 라는 예전 친구의 말에 감명깊어서 울 뻔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포인트는 저 아련한 점(..) 에 있다. ㅋㅋ
나는 여전히 두려운 것이 많다. 많은 걸 초월해서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특별한 이벤트같은 내 생일에서부터 오늘까지, 그저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살다보니 정말 감사한 일들이 많았고 내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지냈다는 걸 여전히 깨닫고 있다. 그래서 더 겸허해지고 낮아지고 싶다는 느낌이 들고, 가끔 자만해지려 하면 이상한 죄의식까지 다 놓아버리려고 한다.
나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지난 며칠 간 거의 작업만 해 오면서 항상 감사하려고 했지만 있는 것에 소중히 하지 않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날들을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소중하게, 하지만 여유롭게 살아나가고 싶다. 완벽하게 비우는 사람이 아닌, 나의 분수에 맞게 비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누군가에게 사랑이나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먼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나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저 나를 사랑하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아무것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싶다. 하찮은 바보가 되더라도 그저 스스로를 아껴주고 내 그릇이 맞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랄까.
정말 많이 비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