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기록과 과정
나는 작업을 할 때 고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작업할 때 마음을 모조리 비운다.
작업을 시작했을 때에 꼭 내가 텍스트와 작업을 일치시키려는 애를 쓰는 방식을 가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살아가면서 스며드는 ‘익히는’ 학습 방식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로 변하였고,
그림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조차 그 과정속에서 모르더라도, 완성이 되면 내가 왜 그렸는지, 어떠한 걸 그렸는지에 대한 의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래서 가장 빈 상태의 ‘공’의 상태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이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자연의 질서대로 이루어진다.
아직 삶을 배워가는 입장으로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내가 무어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지만, 다만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건, 나를 찾는 과정이자 나를 버리는 과정인 것 같다.
요즘에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모든 감정과 생각 뒤에 어떠한 공간이 있다.
내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그 텍스트 뒤에 있는 공간을 찾고 있다. 그 공간 속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동시에 쉴 수 있다.
어떠한 확신을 하지 않아도 확신이 있는 신비이자, 주장을 하지 않아도 명확히 내 것인 그 공간은 나를 안심시킨다.
아무것도 몰라도 되고, 내가 그동안 책에서 배워왔던 머리로 깨달았던 영역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쉬고있으면 알아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있다.
지복이라는 걸 예전에는 자주 느꼈었는데 최근에는 무언가를 배우고싶다는 욕구와 동시에 이루고싶다는 욕구가 많았는데, 그것마저도 다 버려버리니 이미 나는 이루었고 학습하고 있었다.
그래서 충분하다는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고, 무언갈 소유하지 않아도 이미 소유되어있는 그 공간, 누군가를 잡지 않아도 내 곁에 있고 주장하지 않아도 명확히 나의 삶이 있는 그 공간,
동시에 누군가와 언어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사람은 나이고 나는 그 사람인, 공감이라는 언어를 뛰어넘는 더 깊은 무언가의 신비가 있다. 그곳에서 모두는 하나이고 그 익숙한 단어조차 필요없는 그런 공간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래서 항상 멀리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고 계속해서 그 공간에 머물려고 한다.
그건 바로 현재이다. 현재란 무엇이야? 하는 순간 현재는 지금이다. 그냥 숨쉬고 있는 지금이고 우리가 잡을 수 없지만 항상 잡혀있는 무엇이다. 동시에 항상 버려야 하고 항상 비워야 하는 무엇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잡을 수도 없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이름표 지을 수도 없다.
단지 어떠한 에너지를 느끼면서 그것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이전에는 그것들마저 느끼고 흘려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이제는 느끼고 싶으면 느끼고 느끼고 싶지 않으면 그 너머에 있는
저 공의 상태, 저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공간이 확장되면서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어진다.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만 어쩌면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라는 이름하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것, 돈, 명예, 집, 이름표, 학벌, 성취해낸 것, 외모, 몸매, 근육, 그런 것들을 빼놓으면 우리는 사라지는가?
아니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사실 모든 건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꾸준히 내가 잡고싶자 잡고싶지 않은 건 저 너머에 있는 우리의 존재이다.
받을 생각 없이 주고 싶다는 마음과, 내가 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좋다고 말할 수 있다는 그런 상태.
내가 ‘어떠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게 아니라,
내가 그냥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사랑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표현마저도 소용없다는 그런 사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도 할지라도 나는 그냥 그러한 생각들과 감각들, 느낌들, 스스로의 언어들과 존재에 대한 감지들을 언제나 믿어가며 삶을 대하고 싶고 작업을 하고 싶고 일상을 균형감있게 소중히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