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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Jun 11. 2024

그곳에서 새롭게 시작할거야.

저번에 친한 언니랑 만나서 이것저것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언니가 미국가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면서 울었는데 그날 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인간의 유년기는 부모의 영향이 클 수도 있고 사회의 영향이 클 수도 있지만 결국에 그게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끼치는데, 난 솔직히 그 굴레에서 시지프스 신화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대로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카르마라는 것의 해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과정은 가슴이 불타듯 아프다. 정말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도 모를 감정이다.


   딱 5년 전에 그랬던 것 같다. 그냥 정말 혼자라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내가 가장 최악의 상태에 놓였을 때 아무도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상태를 느꼈다. 어찌어찌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행복했지만 본질적으로 가족이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걸 엄청 크게 느껴서 난 그냥 고아같았다. 실은 거의 고아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감정을 제일 느끼기 싫어했던 것 같다. 다시는 없을 상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평범한 상황 속에서 엄마나 아빠가 평범하게 자식을 사랑한다는 상황의 아이를 보면서 솔직히 눈물나게 부러웠다. 난 언제나 혼자서 해냈고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지지를 받고 평범한 사랑을 받는다는 건 어느정도 내가 더 야망이 없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내가 더더욱 생각이 짧거나 혹은 단순한 인간이었더라면 많는 노력 없이 이러한 결핍을 활용하여 결국 목표달성의 연료로 쓰거나 성공의 연료로 썼을 것 같다. 결핍으로 인한 성공은 얼마 가지 않아 인간을 채울 수 없는 만족감의 피폐함으로 작용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나는 그 감정의 굴의 깊은 곳으로 뛰어들기로 했다. 나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내가 그 감정에 함몰당항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도 기꺼이 그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는데,


   예전에 언니가 말한 것 처럼,

   나 그냥 프랑스가서 진짜 혼자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거의 20년 넘게 비혼주의라는 신념이 변치 않았는데,

실은 환경이 어떻든 개인이 잘 하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해서 어떠한 환경이든 크게 기대 안 하고 그곳에서도 당연히 고난이 있고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겠지만

결코 나는 다시 마주하고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도 어느정도 있지만,

내가 아무리 주의하고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바꾸려 해도 되지 않는 세상의 이치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힘을 다 빼가면서 애쓰면서 사회가 말하는 “안 되면 될때까지 존나 열심히 노력해라” 라는 줏같은 한국 마인드 말고 그냥 문 안 열리면 니네 꺼지고 내가 다른 곳 간다.


   무슨일이 생기든 항상 고마워하려고 노력하는데 어제는 좀 도가 지나쳤다.

   그래도 그냥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련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상황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그게 내가 지닌 가장 고결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죽어버리는 것, 타인에 의해서 아닌, 그건 정신적 가치 중 가장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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