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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Aug 11. 2024

피터 비스펠베이 첼로 리사이틀

<피터 비스펠베이 공연에서 발견한 드로잉적인 요소에 대한 해석>

“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 레너드 번스타인


2024년 8월 10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터 비스펠베이의 첼로 리사이틀 공연이 있었다. 

   첼리스트 피터 비스펠베이(pieter Wispelwey)는 모던악기와 고악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연주자이며, 8세에 첼로를 시작하고, 암스테르 음악원에서 17세때 안너 빌스마(anner bylsma)를 통해 고음악에 흥미를 얻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음악원을 졸업 후 그는 미국에서 폴카츠와 영국에서 윌리엄 플리스를 수학했다.

   현재 그는 로베르트 슈만 뒤셀도르프 음대와 암스테르담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2024 예술의 전당 국제 음악제에서 피터 비스펠베이 첼로 리사이틀은 바흐 무반주 첼로 전곡을 연주했다. 독무대인 만큼 그의 에너지가 관람객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고, 그를 둘러싼 동그란 흐름들이 그의 연주와 함께 다양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출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발을 구르는 몸짓, 활을 다루는 몸짓의 의도성 뿐 아니라 비의도성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음악적인 연주회의 성격 뿐 아니라 시각적인 퍼포먼스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연이었다. 

   즉, 이 글의 처음 시작한 말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인용한 말처럼, 이러한 그의 연주의 형태를 통하여 관람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답과 질문들을 이끌어낼 수 있고, 이러한 답들을 통하여 연주라는 형태를 더욱 다채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 바로 기계적인 매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동이다. 이에 플루티스트 강도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주자가 무대에서 연주를 할 때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눈만 깜빡이며 손가락만 움직이며 연주를 한다면 음악이 좋다기 보다는 기계처럼 살짝 무서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몸을 사용하여 소리를 내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전자처럼 연주하는 사람보다는 후자처럼 연주하는 사람이 관객에게는 더 와닿는 연주가 될 것이고 더 잘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종의 시각적인 퍼포먼스인 것이다.클래식 음악은 악기 연주를 하는 연주자가 오로지 이끌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음악을 듣는다는 청각적인 것에 표현을 두기도 하지만 생각외로 클래식 음악은 시각적인 것도 필요하다.“


   피터 비스펠베이의 첼로 리사이틀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퍼포먼스, 즉 시각적 회화 드로잉의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드로잉이라는 것은 아주 복잡하고 사실적인 형상부터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까지 무궁무진하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쉽게 그려진 것 같은 드로잉도, 그 한 선을 위하여 수십 번, 수 백번의 선 연습을 하고, 그 전에 완벽한 형태의 사실적 소묘를 수도 없이 연습을 해야 나오는 드로잉의 선이 있다. 한 선을 위하여 그에 따른 역사가 무궁무진한 것이다. 피터 비스펠베이의 선 또한 드로잉과 유사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에게서 발현된 선의 구체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짧은 선, 부드러운 선, 가는 선, 저항이 있는 선, 유연한 선, 토막이 있어서 계단 같은 선, 활을 나선형의 모양(마치 올라퍼 엘리아슨의 강한 나선, 부드러운 나선과도 같이)으로 휘두르기도 한다.

   즉, 선을 그냥 쓰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변화를 통한 연주한다. 마치 발레의 알라스콩 느낌의 길게 늘어뜨리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좌우로 긁어내기도 하고, 팔의 저항력을 통해서 구현시키기도 한다. 부드럽게 파도를 타다가 한 번에 끊어내며 저항력을 이루기도 한다.

   허공에서 자유로운 선, 벨벳같은 선, 뚝뚝 끊어지는 선, 경쾌하고 빠른 선이 있다. 그림에도 드로잉을 할 때 한 획에 정확한 선을 그으려면 숨을 통제해야 한다. 활이 미끄러지듯 드로잉을 하는 움직임이 있고, 호흡과 동시에 공기에서 피어나는 영혼들과 조우하는 느낌 또한 존재한다. 그의 이러한 연주적 특성 속에서 몰입감이 피어난다. 예술에 있어서    몰입이란, 자아를 초월하여 세상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만나는 과정이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숨과 호흡의 소리, 발을 구르기 등이 한꺼번에 합쳐져서 퍼포먼스의 성격을 띠는 예술이 되는 공연이다.

   관람객은 비누칠을 하듯 부드러운 선을 바라볼 수 있다. 부드러운 벨벳 위에 드로잉을 하는 느낌 또한 그에게서 존재한다.

   이 연주자가 존재하는 허공의 동그란 부분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몰입지점으로 느낄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피카소가 허공에서 그린 라이트 드로잉처럼, 드로잉적인 느낌을 이끌어낼 수 있다.“


위의 다섯개의 사진 - 피카소의 라이트 드로잉/ 맨 마지막 사진 - 올라퍼 엘리아슨의 강한 나선(좌), 부드러운 나선(우)

   또한 그의 연주를 한국화의 선에 비유하여 해석할 수 있는데, 한국화에서도 팔의 저항심과 한 획을 잘 구현해 내는 선을 위해 무수한 연습을 하는데, 관람객은 피터 비스펠베이에게서 세월의 숙련도를 읽어낼 수 있다.

   즉, 머리를 써서 연주에 대한 해석을 읽어내는 게 아닌, 몸과 몸을 둘러싼 현존력과 몸과 악기와의 조우, 그리고 관계 등이 필요한 작업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연주 속 움직임을 관찰하면, 우리는 그의 팔의 사용 뿐 아니라 어깨와 목, 얼굴, 손가락 등의 협응력을 이룬다는 걸 관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삼각형의 구도가 한 쪽이 당기면 한 쪽이 또 달리 반응하는 것처럼, 피터 비스펠베이의 드로잉적 움직임에서 협응의 춤을 추는 것을 관람객들은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단지 음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아주 작은 파도들이 물결치다가 점진적으로 커지는 움직임도 보이며, 긁어내는 본능적인 움직임, 그렇지만 정제되어 있는 움직임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즉 이것은 드로잉 뿐 아니라 춤과도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비선형적인 움직임, 정제되지 않은 본능적이고 비선형적인 몰입상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연주는 뒤로 갈수록 경쾌해지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음들이 선을 통해서 발현되고 허공 어느 공간속에서 피어나는 모양으로 존재했다. 마치 에너지의 흐름인 오라(aura)처럼 말이다. 연주자는 독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악기와 함께 이러한 오라를 풍기며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연주자와 악기와의 관계성을 읽어낼 수 있는데, 즉 악기 또한 살아있는 객체와도 비슷하며, 생동하게 연주자와의 좋은 관계로 남아서 그 자체로 존재성을 지니며 공연에 함께 참여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공연은 연주자의 음악적 특성 뿐 아니라 그에게 있는 선적인 미술적 요소,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발을 구르는 동작과 활을 사용하는 방식을 통한 움직임 적인 퍼포먼스 요소, 그와 동시에 연주자와 생동하며 좋은 관계로 함께 연주 그 자체가 되는 첼로라는 악기의 존재성, 이 총합이 바로 피터 비스펠베이의 연주의 모든 형태의 예술성으로 존재하는 공연이었다. 

   마지막으로 물리학자 김상욱의 드로잉과 그림에 대한 의견을 인용하여 글을 마친다. 클래식이라는 장르 자체도 어쩌면 다양한 방식의 예술적 형태로 사고할 수 있는 다채로운 장르이기도 하다. 피터 비스펠베이 첼로 리사이틀을 통하여 다양한 감각을 통하여 그의 예술적 세계관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공간적 구조를 자신의 마음속에 내재화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이다.관측 결과를 구조화하여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것." - 김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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