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테너 콘서트 마이클 스파이어스
<자연스러움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음악에 대하여>
바리테너 콘서트 마이클 스파이어스
자연스러움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욕심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금 더 강하지도 않고 조금 더 약하지도 않다. 그냥 그 상태로 편안하게 있는 상태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나이고 이미 내가 가진 것이라는 의식(awareness)이다.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그 사람은 자신의 최선을 끌어 올릴 수 있고 자기 자신으로 자연스레 존재하니 주변 사람들 또한 편안하고 기쁘게 해줄 수 있다.
너무 극도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은 균형에 맞지 않는다. 무언가를 연기하려고 과장된 행동 또한 자신을 뛰어넘는 어떠한 행위이다.
이 콘서트에서 주목할 수 있는 인물은 여러 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관람자는 공연을 보며 지휘자 ‘이해’와 테너 ‘마이클 스파이어스’에 주목할 수 있다.
그 주목 지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이름부터 생소한 ‘바리테너’란, 한 사람이 두 음역대를 넘나들며 무대를 연출하는 걸 뜻한다 한다. 이 공연에서의 바리테너인 마이클 스파이어스는 런던의 잡지사에서 “세상을 발밑에 두는 테너”로 묘사했을 만큼 완벽한 목소리와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관람을 했을 때 느껴지는 공연장의 넓은 빈 공간에서 그의 목소리가 공명하듯 시원한 음역대를 지니고 있다. 목소리는 저쪽 벽에 부딪혀 다시 공명하여 돌아오고, 그것들은 자연스레 순환되는 형태를 지니며 모든 관람객이 시원하게 들을 수 있는 테크닉을 선사한다.
또한 그러한 테크닉 뿐 아니라 그의 연기력과 표정, 또한 감정의 풍부함이 그가 지닌 정수이다. 연주이건 어떠한 공연이든, 음악가는 악보에 맞는 것만 하면 마치 기계인간처럼 딱딱히 굳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투여한다면 공연은 훨씬 풍부해진다.
자연스럽다는 건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고, 꾸미지 않는다는 건 편안하다는 걸 의미하며, 편안하다는 건 자신의 장점도 인정하고 단점도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인정 속에 진정 자신의 자존을 허용하고 높이는 일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몰입함에 존재한다.
자연스러움은 한 번에 획득할 수도 있지만, 여러 차례 힘을 주는 행위와 여러 차례 부자연스러움과 실패 속에서도 피어오를 수 있는데, 아무리 힘을 주고 배우고 연습을 하더라도 잘 안 되는 경지에 이르다가, 기어코 내려놓으면 안 될 정도로 과부하가 온 시점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내려놓고 힘을 뺐을 때, 진정 본인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 자연스러움을 획득할 수 있다.
즉, 반복의 역사 속에서 반복의 새로움을 느끼며 어느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것에 애를 쓰거나 힘을 주지 않아도 본인의 것이 된다. 그것이 반복의 힘이다.
여기에서 마이클 스파이어스는 자연스럽고 능글맞은 모양새로 공연에 임한다. 힘이 풀려있는 동시에 힘이 있는 그 중간 지점을 잘 찾아내는 자연스러움, 조화로움, 잔망스러움으로 관람객은 편안함과 힘을 느끼고, 그 순간 속에서 ‘좋다’라는 평가 또한 내리게 된다.
테너는 지속적으로 오케스트라 음보다 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음역대를 스스로가 조절하며 음악을 지속시킨다. 즉 음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낸다.
4번째 곡 정도에서는 약간의 슬픈 감정을 가져와서는 지금껏 해왔던 잔망스러움 대신에 훨씬 더 진중하고 진지한 모습을 그는 내보인다.
이 때, 마치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고백 하듯 속삭이며, 호수에 물방울 치듯 아름다운 감흥을 선보인다. 마치 스스로 연기가 아닌 본인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있는 그대로 담긴 그의 모습을 관람자는 관찰할 수 있다.
마이클 스파이어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적 조화와 자연스러움으로 악장마다 바뀌는 재치와 변화를 통하여 공연을 굉장히 다채롭게 이끈다.
또한 다른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관람석 곳곳을 살피며 눈을 마주하면서 ‘정말 소통하듯 노래를 부른다.’ 관중을 무서워하지 않고 친구로 대한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소통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부른다. 즉, 관중이라는 대상 자체도 공연 자체의 미장셴으로 여기고 그들을 공연 안으로 불러들인다. 이 때 공연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그런 허물어진 벽을 보며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그리고 인간적으로 소통한다는 느낌을 그에게 느낄 수 있고, 관람객 또한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한명 한 명의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공연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그의 또 다른 ‘자연스러움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가 표현하는 음들은 다음과 같다. “소리치듯, 자신의 감정을 포효하듯, 가슴에 찍히듯, 동물적이지만 굉장히 절제 된 끝의 음.”
즉,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따르는 인물인 것이다.
“가수가 어떤 존재냐면, 노래에 담긴 영혼과 같은 선상에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거죠. “ - 영화 <타르> 중
그는 인간적인 면모로 자신의 역할을 허영 없이, 꾸밈없이, 진심을 다해서 소화해낸다. 즉, ‘역할’이라는 이름조차 떨쳐버리고 그 과거의 어떤 이가 쓴 역할 자체를 현재의 자신과 만나는 일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서 릭 루빈이 한 다음의 말과 마이클 스파이어는 일맥 상통한다.
“예술은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하고,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전부를 가져와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자만과 허영심, 자기 미화, 타인의 인정을 초월하는 일이다.“- 릭 루빈
두 번째로 관람객이 주목할 수 있는 인물은 지휘자 ‘이해’이다.
어느 사람이건 무엇인가를 지휘하거나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모든 걸 알아야 하고 모든 조화를 지켜야 한다. 한 명 한명 소중하게 다뤄야 하지만 모두를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무시 또한 필요하다. 연주자에게 단지 강약만 기계적으로 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통솔하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히사이시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에 오랜만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을 지휘한다. 그래서 한창 다양하게 공부 중인데, 강약이나 템포 같은 것만 말하면 지휘자가 음악으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오케스트라 연주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그저 강약이나 템포만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미 악보에 적혀 있다. 심지어 제5번이라면 금관악기가 전주를 연주하는 부분에서 전체로서는 음량이 크지만 실은 각 악기의 강약 기호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래서 지휘자는 악보의 미묘한 차이를 완벽히 파악한 후에 실제 오케스트라에서 나오는 소리를 냉정하게 나누어 듣고, 나아가 오케스트라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는지 제시해야만 한다. ~ 하지만 ‘여기는 달달한 소리가 아닙니다. 피아노라 해도 러시아의 황량한 대지처럼 차갑게.’ 라고 말하면 오케스트라도 ‘아, 그런 소리를 원하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지휘자는 시간을 통제하는 자이자 모든 것들의 조화를 맞추어놓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공연에서 지휘자 ‘이해’는 테너 음악에 몸을 맡기듯, 흐름에 맞추어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지휘를 했다. 그에게서 관람자가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점 중 하나는 바로 이중성에 있다. 이에 대해서, 러프하면서도 섬세한 부분이 한 번에 있고, 뻣뻣하면서도 부드러운 지점이 있으며, 여리면서도 강한 부분이 있으며, 한 연주자에게 집중해서 말을 걸 듯 소통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공기의 흐름대로 에너지가 흐르는 느낌 또한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클래식으로 힙합을 하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관람객은 그에게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어로 옮기기에는 무척 어려운 성향의 움직임, 즉 그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연주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한 걸음 나아가기도 하고 단호하기도 한 그의 몸짓은 마치 여러 가지 이중적인 모습을 스스로의 성향이 묻어져 나오게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지휘하는 듯 나아가는 모양새를 우리는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하고 부드러운 나뭇결 같은 지휘자의 지휘대로 오케스트라는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절도 있다가 부드럽다가도 뻣뻣하게 서 있다가도 가볍게도 튕겨져 나가기도 하며, 지휘봉을 마치 물 안에 있는 저항심을 활용하듯 움직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히사이시 조가 말한 힘을 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다른 예술에서도 스포츠에서도 신념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기합을 넣으면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 지휘로 말하자면 팔에 힘이 들어가면 아무리 열심히 흔들어봤자 스피드는 나오지 않고 다른 근력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축이 흔들리거나 머리를 앞뒤로 크게 젓게 된다. 지휘자 스스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연주자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골프로 말하자면 헤드업이다. 힘을 빼는 것. 어쩌면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결국은 자신이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 명확한 비전을 지니는 것이다!“ - 히사이시 조의 음악일기
또한 모든 똑같은 그림 작업이 없듯, 지휘 또한 그러하리라 여겨진다. 이는 음악 영화인 타르의 다음과 같은 대사와 맞아 떨어진다.
“남의 걸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해. 당신 방식대로 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지휘하느냐야. ‘그 영향은 무엇인가? 내게 무슨 짓을 하는가?’ 이 두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좋은 음악은 빛이 날 수도 텅텅 빌 수도 있어. 우리가 지휘자로서 어떻게 의견을 담아야 할까? 솔직히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도 있어. 그리고 오케스트라 앞에 서서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지. 여러분의 뭔가를 담아서 음악을 지휘할 때니까. 모두 아는 음악이지만 매번 다르게 들릴거야. 여러분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결국, ‘영혼이 자신이 있을 곳을 선택한다.’ 잖아. “ - 타르
이 콘서트를 통해서 관람객은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다양성 속에서 작품의 취향적 문제, 좋고 좋지 않음의 판단, 그리고 그 순간 몰입할 수 있는 몰입력 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낱낱이 파헤쳐 보았을 때 결국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자연스러움’이 기저가 되어서 자신의 테크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으로 함께 토론해볼 수 있는 공연이다.
온전히 ‘잘 한다’라는 개념 자체는 어쩌면 구시대적인 발상이고, 그 잘함을 뛰어넘는 힘은 바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인데, 어떠한 ‘지속된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되며 창조해 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뻔뻔하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클래식이 가진 힘이 아닐까.
클래식이라는 구조물 위에 본인의 개성과 풍부한 감정과 스스로 느끼고 관찰한 무언가를 집어넣었을 때 음악은 풍부하고 꽉 차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회 메이지 국제 벨칸토 페스티벌, 바리테너 콘서트 : 마이클 스파이어스.
장소 : 롯데 콘서트홀
출연 : 마이클 스파이어스, 이해, 고경일, 타라 스태포드 스파이어스, 메이지 오페라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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