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나

박하리

by hari

요즘의 나는 무언가 미쳐있는 것 마냥 일만 한다. 처음에는 최선을 다하려고 힘을 주고 노력했다가, 그런 시기였을 때에는 집에 가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는데, 이젠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한다.

일만 하는 나는 요즘에 문득 많이 하는 말이, ‘존재하자.’ 이다. 나는 존재하고 감각하기 위해 이곳에 있으니 일분이라도 더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같다.

3년 전에 갑자기 많은 기회가 쏟아져 내렸는데 그 속에서 꽤나 어렸던 나는 거기에 취해서 겸손하거나 겸허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때에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했지만 마치 그 때의 축복이 평생 지속될 듯 한창 업되어 있었고 돈도 물쓰듯 쓰기도 했다.


오늘 티비에서 93세 할아버님의 인터뷰를 봤다. 저 나이가 되면 죽음과 가장 가까워 있을 텐데 어떤 마음이실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같으면 웃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분은 화면 속에서 웃고 계셨다.


난 이제 욜로라는 말은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현재에 충실한 것은 좋지만 미래나 과거 없이 현재만 탈진해버리는 삶은 그저 투기이다. 대신 막혀있는 계획보다는 유동적이고, 물질 자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물질과 친구가 되어서 그걸 잘 다루는 법을 익혀서 내가 하고싶은 것들과 할 수 있는 것, 세상과 이롭게 관계맺는 법을 처음 걸음마 하듯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는 요즘이다.


오늘 새벽에는 역시나 배가 고파서 깼고, 요즘 일만 했던 내게 상을 주듯 그림만 엄청 그렸다. 나의 모든 갈증이 해소가 되었다. 여하튼 문화예술 일이라서 갈증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삶은 나에게 있어서 여전히 죽음인가보다. 그것은 언제든 나의 기둥이 되어있고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친구는 전문적이고 기술이 좋고 표현도 풍부하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는 예술적으로 결핍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학고적이면서 자유롭지만 여전히 인정을 바라는 게 아이러니하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다. 인간의 인정이라는 건 언제나 낯설다. 안 그럴 것 같은 쿨한 사람까지 여하튼 원하는 건 사랑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학고적으로 평가할 때마다 옆에서 나는 지켜보며 여전히 그 눈초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밀도 앞에서는 평가가 무력하다. 모든 것의 균형 사이에는 밀도라는 게 있는데 그건 너무 많이 고민하지 않고 일단 저질러 보고, 실패를 하면 그걸 토대로 계속 나아가며 다작을 하는 것이다. 완벽을 바라는 게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며 완성 안에는 불완전성까지 포함하는 인정이 있어서 타인의 평가가 그 앞에서 무력해진다. 왜냐하면 완성은 부족함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행위이기에, 그것의 평가의 긍정적 측면만 바라지 않고 균형지점을 찾아가면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완성형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같다. 그건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고 작업 또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다. 모든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자기 자식이 부족하든 어떻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내 작업이 부족하든 진심이 잘 안 담겨있든 상관없이 여하튼 나라는 사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니 내가 스스로 인정해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게 내 작업에게 해야 할 소명이기도 하다. 작업 또한 인격체처럼 생명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해서 면밀히 분석하고 살피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작업을 한 뒤, 몇 개월이고 몇 년이고 다시 그 작업을 꺼내보았을 때 그 때의 에너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 자신의 일부분과 조우하는 그 순간이다. 난 여전히 문화예술이 좋고,

그것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나의 중심을 잘 잡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것 같다. 마치 문화예술의 하인처럼 나를 통해 표현되도록 말이다. 난 그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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