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예술과 사랑, 그리고 그 경계와 균형에 대하여. - 박하리
사랑이라는 걸 누군가는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해석과 감각은 정말 풍부하고 그것에 대하여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란 쉽지가 않다. 사랑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너무 열정이 과하면 집착으로 변화할 수 있고, 너무 무심하면 사랑이라는 이름 대신 권태라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연인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어쩌면 보이지도 않는 그 이름으로 우리들은 싸우기도 하고 포용하기도 하며, 갖은 여러 가지 시련과 상황으로 뒤범벅된 드라마를 바로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사랑은 변치 않고 드라마도 아닐 것이다. 연인 간의 것만도 아니고 부모와 자식 간의 것들에 한정되어 있지도 않다.
어떠한 사랑이라는 이름표로 사랑을 구속하는 것만큼 사랑에 대한 이해를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에는 이름표가 없기 때문이다.
2024년 4월 26일부터 2024년 9월 10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는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가 열렸다.
어렸을 때부터 불안정한 집안 환경과 더불어 가난했던 환경에서 뷔페는 그림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자신의 몰입력과 감각을 분출할 수 있었고 그런 몰입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아서 이른 나이에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러한 환경 때문에 여러 가지 오해에 시달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기도 한다. 추상미술이 유행했던 시기였기에 구상미술을 했던 그는 미술계에서 외면받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들 때문에 그는 젊을 때 종종 불안과 인간의 고뇌 등에 대하여 사물과 자화상으로 표현하곤 했는데, 그러한 모습을 ‘광대’로 표현하는 회화 작품과 영상 작품 또한 볼 수 있다. 항상 날카로운 선을 쓰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뷔페라는 사람 자체가 얼마나 예민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동시에 과감한 마띠에르나 시원한 선, 집중된 선들을 통하여 그가 그림에 얼마나 몰입하고 어떠한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지가 뚜렷했기에 이런 에너지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해서 그는 이른 나이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가 그렸던 그림의 사람들의 눈동자는 불안정적이며 공허한 생김새였다.
전시는 그의 젊을 때, 즉 스타 작가가 되기 이전 마띠에르의 사용이 적었던(물감 값이 비싸서 물감을 많이 못 사용했다고 한다.) 시기, 스타작가가 되어서 과감한 마띠에르와 광대를 주로 그렸던 시기, 후에 안정적으로 변화하여 여러 성들과 건물들을 관찰하여 그렸던 시기로 나누어서 디피를 해 두었다. 하지만 가장 마지막쯤의 전시장은 그에게 있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아내인 아나벨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모두 자살해서 생을 마감한 아나벨의 상황과 본인의 가정사에 대한 공감, 그리고 그로 인한 공감과 연민으로 인하여 그는 그녀를 굉장히 사랑했는데, 그러한 사실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림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모양새를 띤다. 언제나 불안정한 사람을 그렸던 그의 손이, 아나벨을 그릴 때에는 한없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이는 그림 자체에서 ‘어떻게 하면 본인이 가진 가장 큰 능력으로 그녀를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그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관람객을 압도시키기도 하는데, 그녀를 그린 선들이 기존의 그가 지속적으로 그려왔던 습관적인 날카로운 선들로 발현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꾹꾹 참아내고 최대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선을 표현하고, 많은 사랑으로 헌정하겠다는 마음가짐 자체가 그림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는 그림을 사랑했고, 그것을 초월해서 아나벨을 사랑했던 것이다.
누군가와 자신의 아픔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사실 그것이 사랑이 지닌 가장 커다란 치유 효과인데, 각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아픔을 뛰어넘고도 사랑할 수 있는지가 가장 진실된 아토포스적인(사랑의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가 정의한 개념)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고통을 마주하고 자신의 고통을 마주한 뒤, 그것을 뛰어넘고선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무조건적인 사랑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고통을 허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는데, 고통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부정하면 커지고, 그것을 감내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자신을 잃어도 사랑을 택한다는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뷔페는 힘들었던 시절 속에서도 아나벨을 사랑했고 그것이 자기 자신이 지닌 가장 고결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랑, 그것은 존재하는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에 대한 고찰들은 매번 있어왔지만 그 추상적인 것들을 잊고 바쁜 현실을 살아갈 때에는 삶은 쳇바퀴처럼 돌아만 가고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해도 삶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비효율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지만(곧장의 이익이 없기 때문에.), 모든 영역을 초월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한 비효율성을 택하고 스스로 손해를 봐도 된다고 허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손해가 아닌 이득이 생기고 그 이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 또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는가? 어쩌면 손해일 수도 있는 그 행위는 우리의 가슴을 깨어있게 해 주고, 많은 것들에 열정을 불어넣어 주며, 그 단순한 호기심과 내적 가치로 인한 행동, 즉 이익을 바라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는 그 행동 자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고 또 그 누군가 또한 스스로를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선순환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시인이자 화가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빛이여! 오, 빛은 어디에 있는가? 타오르는 열망으로 불을 켜라! 천둥이 치고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가른다. 밤은 흑요석처럼 검다. 어둠 속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 너의 생을 바쳐 사랑의 등불에 불을 켜라 27. 타고르
누구든 가장 아름다울 때는 사랑할 때이다. 그건 가장 큰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까지도 포함되는 사실이다.
“우주의 모든 이치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직 한 사람, 바로 당신에게로 향해 있다.”
- 월트 휘트먼 walt whit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