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다시 내 방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어서 많은 걸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누구나 다 그러겠지만 한없이 넓은 도화지에 무언가를 채운다는 것 자체는 인간이
지닌 숙제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걸 채우는 게 어렵다고 느낀 적도, 방향을 정하는 게 어렵다고 느낀 적도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명확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내가 명확하게 설정해 놓은 경로를 이탈해보고 나니, 내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할 지가 조금은 헷갈려서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내가 원하는 건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든 언제나 나에게 왜 그렇게나 바쁘게 사냐고 물을 때, 나는 바빠서 지친 적도 거의 없고, 그게 힘들지도 않았다. 단지 하고싶은 게 너무 많고 에너지가 너무 넘친다. 그렇지만 내가 힘들 때는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나 복잡할 때가 그러한데, 이번에 그랬다.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게 많이 힘들어서 그걸 많이 놓아버리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작업과 모든 활동을 다시금 초심자의 마음으로 겸손하고 겸허하게 시작했는데
그냥 그게 좋았다. 역시나 그게 전부여서 많이 울었고 많이 놓아버렸다. 예술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건 여전히 좋고, 날 위해서 그리는 그림은 여전히 행복하다. 매일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다가, 이게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이게 인생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획하고 싶은 공연이 생기자 또 엄청 하고싶어서 하루종일 영상 만들 밑그림 그리는 내가 있었다.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는 거 같은데, 언제나 이 주관적인 세상 속에서 과연 내가 세상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분명 누군가는 나를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나를 싫어할 테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저 그런 나도 문제가 있다고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성격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될 일일거다.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예쁘다고 하고 전 남자친구들은 나를 갈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중요하고 누군가에게 예쁨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로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버리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버리지 않을 것.
가족이면 효도를 해야한다는 강박이나 혹은 가족에게 잘 해줘야 한다는 혹은 내가 가족을 돌봐야 하고 내가 문제없이 살고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가족에게서 벗어나서 나 스스로 존재하게 된 거 같다. 유튜브에 우연찮게 ‘의존적인 엄마‘ 라는 정신과 의사 분의 채널의 댓글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하는 모든 고민들이었던 것들을 댓글을 통해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엄마를 키운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엄마는 스스로 하는 걸 회피해서 내가 대신 해주고 감정적인 짐도 나에게 감정 쓰레기인 것 마냥 퍼붓곤 했는데 그게 트라우마정도로 커져서 어느 순간은 엄마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 조차도 너무나 큰 짐이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항상 가해자였다.
댓글을 보고 엄마를 욕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나와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이 많음을 보고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 오히려 보호를 해줬던 사람들. 엄마에 대한 슬픔과 화로 덮여있는 댓글이었는데, 나는 그걸 보고 엄마에게 화가 나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 또한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하는 연민에 오히려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한테 연락해서 스스로 사는 법을 터득하라고 말했다.
다시 산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냥 일상을 행복하게 살고 좋아하는 것들을 공부하고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며, 혼자서 살아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아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살고싶은 게 내 욕구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평화, 안정, 자유, 힘, 균형, 공부, 창조
그게 내가 원하는 것 같다.
매일 뭔가를 배워서 내가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대체 뭐인가 고민해도 나오질 않았다.
책에서 ‘배움은 배움만으로도 충분하다.’라는 글을 봤는데 딱 그 말이 정확한 거 같다.
내가 배우고 싶은 이유였다.
그래서 다시 많은 걸 사랑하고 싶다.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사랑 말이다.
사랑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