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이 뭔데?

L'essentiel est invisible pour les yeux

by hari
'잘 해? 잘 그려? 잘 써? 공부 잘 해? 잘 할 수 있어?'


사회에서는 '잘'이라는 말을 너무나 습관적으로 쓰는 것 같다. 대체 '잘'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잘'은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어떠한 것을 잘한다는 것과 결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잘'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이 생기는 순간, 결과에 대한 강박 또한 생긴다.

자기 고백을 하자면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잘' 하고자 하였고 또한 '잘' 하였다. 되돌아보면 완벽주의자였다. 과정 또한 중시하고자 하였으나 내 머릿속에 맴돈 것은 결과였다. 성과였다. 어떠한 것을 잘 하여 성과를 보여주어야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연결되어 있어서 '잘'이라는 것이 머릿 속에 깊숙이 연결되어 있으면 그것이 강박증으로도 번진다. 강박증은 완벽주의와 결부되고, 그것은 두려움을 쉽게 느끼게 한다. 어떠한 사소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전체적인 객관성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우울증으로 번질 수 있다.

완벽주의자인 사람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그녀는 '잘'이라는 것에 대한 강박증이 심하다. 모든 생활에 있어서 다 잘 해야 하고 결점을 가지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공부도 그렇고 성생활 중 피임 또한 완벽하게 하고자 한다. 대학 생활을 하다가 성관계를 맺었다 가정하자. 분명 생리 주기의 날짜도 그렇고 피임도 하였고 임신할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하다. 겨우 1% 안팎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하다. 1%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것이 불안한 이유는 완벽하지 않아서 이다. 또한 그녀는 비극에 관하여 끝까지 상상을 하는데, 만약 임신을 하면 낙태를 해야할 것이고, 그것이 학교 생활을 하는 도중이라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생각한 뒤 그녀는 불안해진다. 겨우 1%의 가능성 때문이다.

정말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주위에서 이런 극단적인 사람을 꽤 많이 만났다. 나 또한 이런 극단적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 사람들을 만나면 정말 완벽해 '보인다'. 그들은 자신을 뽐낸다. 모든 스포트 라이트를 다 받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스포트 라이트는 인공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적으로 꺼질 수 있다. 그것이 꺼지면 암흑이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하다. 스포트 라이트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까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존재한다. 암흑 속에서라도 존재 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암흑 속 그들이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들은 존재한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암흑 속' 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말이다. 가시적으로 스포트 라이트를 다 빼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가시적인 것으로 그 사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본질 속에는 가시적인 것 말고 다른 어떠한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들의 내면 속에 말이다. 그들은 스포트라이트가 없어도 하찮지 않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나는 '뼈' 라는 말을 좋아한다. 뼈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을 지탱해주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현재의 우리들은 '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은 가시적이다. 살이 전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사는 '살'이다. 학력 능력 외모 스펙 직업 돈 명예 등등 말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뼈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꼭 잘해야 할까? 왜 그래야 할까? 그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남길까? 물론 우리는 '잘'이라는 목적도 가져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잘'이라는 것 말고도 우리의 본질, 인간성, '뼈', 삶의 의미, 느낌 등과 같은 것의 탐구도 동시에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