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상 나를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말을 아꼈다 나를 보았다 그게 그의 전부였다
거대하게 퍼붓던 기억들도 내 존재 밖으로 숨어버렸다 항상 나를 바라보았던 눈빛도 맥없이 그의 거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곁으로 달려가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지금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관계가 마치 ‘무’였던 것 마냥 아무렇지 않게 그 길을 걷고 있다 너무 당연한 듯이, 그리고 후에 절대로 마주하지 않을 것 같이 꼿꼿하게 걷고 있다 우리의 당당한 모습에 힘이 빠진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앞에서 주저앉아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꼴이 되었다 잡으려 소리 지르지도 못한다 나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내 의지대로 사라졌다 그를 부르기가 싫다
여기까지 걸어와서 여기에 쓰러져 있는데, 다시 내가 온 길을 되돌아간 뒤 그가 가고 있는 길을 걷기 두렵다
그에게 도달해서 그를 불렀을 때, 오빠, 하고 불렀을 때 뒤돌아 볼 사람이 ‘그’가 아닐까봐 겁난다 타자가 그의 모습을 한 채로 대답할까봐 겁난다 어쩌면 내가 슬퍼했던 그 사람이, 꿈 속 한 줄기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쓰러진 채로 그의 뒷모습만 보고 있다
굵은 소나기의 가닥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그의 모습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 소나기들은 언젠간 합쳐져 거대한 물줄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모습은 완전히 실루엣으로 자리 잡혀 나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