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는 이공계 출신이다. 여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학교의 이공계 학과는 남자 비율이 굉장히 높다. 여친이 졸업한 과는 그 중에서도 남자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는 남사친이 많다.
나는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술과 밤이 있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생각하며 대부분은 공감할 것이다.
물론 남녀간에 친구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여사친은 있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존재감을 인식할 정도로 그렇게 가까운 여사친은 없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에게는 있다. 좀 많다. 대학교 동기들이다.
내가 여친의 남사친을 신경쓸 필요가 있는지의 여부는 남사친들의 행동에서 결정됐던 것 같다.
나는 잘 보이고 싶은 여자에게는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굳이 잘 보이고 싶은 이성까지 아니더라도 내 약점은 기본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정말 친하다면 약한 모습 몇 개 쯤은 보여줄 수도 있다. 그래도 잘보이고 싶은 이성에게는 아니다. 편하다고 내 약점, 약한 모습을 별 고민 없이 펼쳐서 보여준다면 아무리 친해도 연인으로 발전할 수 없다. 여친이 묘사하는 남사친들의 모습에는 이런 광경들이 유독 많아서 내가 신경이 곤두설 필요가 없었던것 같다.
여친이 묘사하는 남사친들은 학창시절의 연장선을 보는듯 했다. 연애의 주도권을 여자가 꽉 잡고 남자는 질질 끌려가는. 그래도 스펙은 좋았던 그들이어서인지 선물의 스케일은 컸다. 샤넬 백이라던가 루이비똥 백이었다던가.
대체로 백이었다. 직장인 월급 두배는 하는 고가의 명품백들. 사귄지 고작 한달인데 명품백은 대체 왜 선물하는건데? 그걸 받는 애들은 또 뭐야? 여자친구는 친구들이 답답하다고 혀를 찼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같이 웃어줄만 했는데 입을 다물어야할것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남사친A가 3년 사귄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했는데 말만 들어도 화려하고 값비싼 프로포즈였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티파니였나? 명품 반지를 주며 결혼하자고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프로포즈에 큰 돈 들이는 남자들은 많으니까. 문제는 결과였다. 프로포즈 받은 날 여자친구가 가만히 있더니 다음날 결혼은 안 될거 같다고 대답했단다. 보통 연애를 여자가 결정하고 결혼은 남자가 결정하는거 아니었나? 프로포즈를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나의 세계관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거절 이유였다. '엄마가 오빠랑 결혼하지 말래'
후일담도 길지만 A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짧게 설명하면, 여친이 A의 연애에 대해 진작에 헤어져야하는 여자였다며 이제라도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폭풍 소개팅을 시켜주는 중이다.
여친이 프로포즈에 대한 생각을 밝힌적이 있다. 결혼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세 가지야. 꽃, 편지, 진심. 사랑하는 남자의 프로포즈라면 이 세가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이건 여자라면 누구나 똑같을거라 생각하고 친구들이 프로포즈 뭐 준비할지 물어볼 때도 다 똑같이 대답해줬어.
나나 여친이나 결혼 적령기다. 여친 남사친들도 슬슬 결혼하기 시작했고, 프로포즈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자 측 의견을 여친에게 많이 물어봤다. 남사친 B도 프로포즈를 어떻게 할지 물어봤던 친구 중 하나였다.
프로포즈 3종 세트. 꽃, 편지, 진심. 진심이 애매하긴 하지만 꽃과 진심을 준비하는 것은 쉬웠다. 꽃은 사면 되고, 진심은 .. 있으니까 프로포즈 하는거겠지. 문제는 편지였다. 이과 중의 이과 ㅇㅇ학과 출신인 그들에게 글쓰기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어려워하는 미분과 적분이 그들에게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인 것과 반대로, 남들에게는 그냥 쓰면 되는 편지 쓰기가 그들에게는 미분적분보다 수백배는 어려운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이런 멘트가 나온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는 결국 답을 찾아냈다. 그 누구보다 이과스러운 방법으로.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여친의 남사친 B는 프로포즈 편지를 쓰기위해 챗GPT를 켰고, 여친과 있었던 키워드를 포함해서 A4 용지 3장 분량의 프로포즈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 AI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B는 정말로 챗GPT가 말해준대로 편지를 써갔다. 여자친구 앞에서, 우리 결혼하자며 챗GPT가 써준 편지를 그대로 읽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은 여자친구는 .. 편지의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결국 울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
그것도 어떻게 보면 정성이고 노력이었을까. 프로포즈는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결혼 일정을 잡은 상태다.
친구들 얘기하며 싱글벙글하던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 프로포즈에 중요한건 3종세트인거 알지? 꽃, 편지, 진심.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편지야. A4 3장 분량은 돼야할거 같아. 그것도 챗GPT의 도움을 받지 않은 편지면 좋겠어.
챗GPT? 편지? 그건 쉽다고 하니 여자친구가 움찔하더니 대답했다. 오빠가 진심을 쉽게 생각하네. 내 친구는 여친이랑 평생 살 생각하니 감격돼서 울었대. 알았지? 오빠의 진심은 눈물로 확인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