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주제의 글을 많이 써서 그랬던것 같다.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30대 남자 의사는 많지만 글까지 쓰는 사람은, 그것도 현대사상을 근거로 쓰는 사람은 나빼고 본적이 없으니까.
브런치는 페이스북과 성향이 많이 다르다.
피드에 뜨는게 아니고 찾아들어오는 분들이 많은게 큰 차이다.
똑같이 실명을 달고 쓰는 글이지만, 페북에는 잡다한 얘기를 적기 조금 부담스럽다.
내가 쓴 글이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느낌이랄까.
'일기는 일기장에 쓰시오!'
반면에 브런치는 일기장에 가까운, 에세이 글을 적기 좋다. 실제로 브런치에는 그런 글이 많이 올라오고 호응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지금까지는 페이스북에 먼저 글 쓰고, 그걸 이어서 브런치에 가져왔었다.
페북 게시글에 리플을 달면 끌올 효과가 있기 때문에, 페북 리플란에 브런치 링크를 달면 좋아요가 더 올라간다. 페북의 알고리즘을 이용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조금 다르게 게시글을 올리고자 한다.
브런치에는 적절하지만 페이스북에 올리기에는 애매한 글을 많이 쓸 예정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브런치만을 위한 글을 쓸거란 얘기다.
페북과는 전혀 상관 없이.
게시글 스타일을 바꾼다 했지만
그동안 해왔던 스타일의 글도 계속 올리려고 한다
첫번째가 페미니즘, 두번째가 의료 관련 글이다.
페미니즘
2023년 출간된 "Flowers of Fire"라는 책은 내게 깊은 감명을 줬다.
NYT에서 주목한 페미니즘 서적이다. 정하원 기자가 쓴 책이다.
정하원 기자가 쓴 'Flowers of Fire'
AFP 한국 특파원 출신인 정하원 기자는 언론인 답게 언론이 주목할만한 방식의 글쓰기를 보여줬다. 그녀가 쓴 "Flowers of Fire"는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정점에 서있었다. 팩트 위주의, '그건 니 생각이고'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입을 꿰매버리면서 동시에 읽는 이들에게 몰입감을 선물해주는 그런 글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한국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아쉬운 점은 이슈가 여성 입장에서 쓰여지는 경우가 대다수고, 여성이 아닌 프로 작가들도 대부분이 소위 '남페미'성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이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남페미'성향의 남성들이 남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과연 옳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평범한 커리어의 일반적인 직장을 가진 2020년대 2030 연령대의 한국 남성이 페미니즘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런 2020년대 한국 2030 남성을 대변하는 글을 쓰고 싶었고, 나의 커리어 - 평범하게 재수해서 평범하게 6년만에 의대 졸업하고 평범하게 군복무 마친 뒤 비는 시간 없이 인턴과 레지던트를 제때 마친 전문의. 어떤 의사도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 의사의 커리어다 - 는 그들을 대변할 자격을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Flowers of Fire"에 대해 더 평하자면, 아주 잘 쓰여진 페미니즘 서적이다. 다만 30대 남성인 내 눈에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뱉은 명대사가 떠올랐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어쨌든 팩트로만 쓰여진 책이었지만 가해자는 모두 기득권 남성이었고 책에서 묘사되는 '회식'은 법이 보호해주지 않는 여성들의 수많은 성범죄 피해를 발생시키는 그런 미친 범법현장이였다. 내가 겪은 회식은 그러지 않았는데 .. 여튼 그런 사람도 있었고 명확한 근거도 있는게 딱 언론인의 글쓰기 스타일이다.
책에서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한국 남자들은 '한남'이거나 결국 한남이 될 '한남 유충'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 남자들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책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이걸 목표로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것 같다. 할 수 있을까..
의료
의료 관련 글은 주로 내 레지던트 시절의 기억을 위주로 묘사되었다.
나는 뇌와 척추 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전문의다. 전문의 면허증 취득 후 이어지는 뇌와 척추의 기로에서 나는 척추를 선택했고, 뇌는 내 현재와 미래가 아닌 과거로 남게 되었다. (뇌 CT, MRI 판독은 지금도 계속 하고 있긴 하다)
미국 신경외과 학회 AANS의 '젊은 신경외과의사 위원회' 로고. 신경외과는 주로 뇌와 척추를 다룬다. 레지던트때는 둘 다 했고 지금은 척추를 주로 진료하고 있다.
인간은 삶과 죽음, 탄생과 사망에 대해 가장 흥미를 느낀다. 이 중 탄생은 신생아의 출산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모든 행동들, 즉 연애와 섹스를 포함한다.
나도 삶과 죽음 중 앞의 주제에도 큰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쓰려면 정말 재미있고 독창적인 글을 수십개는 쓸 수 있다. 하지만 결혼을 계획 중인 내가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건 나한테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며 여자친구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선 죽음에 관한 글을 써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삶과 죽음 중에 죽음은 뇌와 가장 관련 있으며, 신경외과 레지던트 4년간의 경험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던 시절의 기억이다. 지금까지는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이제는 더 가져올게 없고 이전에 남겨두었던 메모에서 더 가져올 수 있을듯 하다.
의사인 나까지도 눈물나게 안타까운 죽음이 여러번 있었으며, 보호자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던 어찌보면 버림받은 죽음도 떠오른다. 5개 정도는 공개된 게시글로 작성해도 될것 같다.
척추에 대해서는 가까운 미래, 적어도 2024년에는 쓰기 힘들것 같다.
첫번째 이유는 척추 분야는 나의 현재에 대한 글이며 프라이버시 같은 민감한 문제를 처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뇌는 신경외과만의 영역이지만 척추는 신경외과 외에도 전문가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내 커리어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다. 레지던트 4년간의 뇌와 더불어했던 척추 임상겸험, 그리고 우리들병원에서 2년 가까이 겪은 척추 전문병원에서의 수련은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커리어다.
하지만 척추 분야는 워낙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많다. 척추는 신경외과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형외과와 양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과 의사들도 척추 관련된 의료행위를 많이 하고 있다. 그 분들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글을 쓰려면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할 것이다.
(당장 쓰려면 최근 진료한 환자들의 사연으로 재미있게 쓸 수도 있는데 모두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날 분들이라 쓰기 애매하다 ㅠ)
새로운 스타일은 다소 에세이 스러운 글, 그 외에는 주로 서평을 쓰게 될것 같다.
에세이, 그냥 나는 일기장이라고 묘사하고자 하는데, 이 글도 사실은 일기장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페북에 올리기에는 굉장히 부적절한 형식으로 보는 글이다. 하지만 브런치에서는 쓰기 적절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형태의 글을 앞으로 종종 올리고자 한다.
두번째는 서평인데,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1881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는 2부작으로 계획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1부만을 유작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0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사망 전 마지막으로 쓴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싶은 "종합 소설"'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묘사했다.
개인적으로 평론가의 평점이 높은 영화를 좋아한다.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관람 후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이 쓴 영화 리뷰도 찾아 읽는데도 시간을 많이 들인다. 영화를 보는 것도 기쁨이지만 거기서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도 내겐 영화를 보는것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의 기쁨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하고나서, 나는 리뷰를 열심히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대심문관' 등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한 리뷰가 많았지만 몇가지의 리뷰만으로 커버하기에는 책이 묘사하는 줄거리가 너무 길고 방대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호흡이 정말 길다. 짧게 크롭해서 평하기에는 각각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엮여있어서, 글 하나로 책 전체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자친구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여자친구의 리뷰를 듣고 느꼈던 기쁨은 불가능하다고 그만두기에 너무 컸다. (여자친구는 천상 이과 출신임에도 문학에 담겨있는 작가의 생각을 능숙하게 파헤쳐서 나를 감탄시켰다)
따라서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서평을 짧게 여러편 쓰고자 한다. 소설의 일부에 대해서 내가 느낀 점을 쓸 예정이다.
2024년에 대해 기대되는 것은 많다. 결혼도 하고싶고 (아직 상견례도 못 했는데 이런 얘기 해도 되나 ..) 아픈 환자들 안 아프게 해드리고 싶고(이걸 맨 앞에 넣어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글도 많이 쓰고싶다.
일기장 형식의 글이었는데 참 길게도 썼습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의미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