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떡볶이와 붕어빵이 있다면
유럽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흔한 음식
유럽 음식,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갓 구운 피자나 파스타일 수도, 달달한 젤라또나 크로와상일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유럽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꽤 많이들 가장 그리운 음식으로 케밥을 꼽습니다. 그만큼 케밥은 유럽 골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하고 맛있는 길거리 음식이에요.
비엔나에도 작은 케밥 가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떡볶이나 호떡,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를 쉽게 볼 수 있듯, 길을 걷다 보면 따끈한 온기와 조명이 새어 나오는 노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케밥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비엔나에 살면서 가장 자주 먹었고,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단연 케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케밥이 오스트리아 전통요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케밥에 호기심이 생겼던 거겠죠.
비엔나에서 케밥을 처음 만나다
특히나 추운 날 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트램을 기다릴 때, 근처 가게에서 퍼지는 케밥 냄새는 정말이지 뿌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식사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장 케밥이 먹고 싶어지는 순간이죠. 지금은 케밥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지만, 한국에 살 때까지만 해도 케밥이 어떤 음식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어요. 이런 제가 케밥을 처음 먹은 것은 몇 달 전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앞에서였습니다. 약속시간에 조금 일찍 도착해 지하철역 근처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시간도 남고 배도 고프니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음식을 사 먹어보기로 한 거예요. 이게 케밥과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습니다.
오페라 극장 건너편 Kalsplatz 지하철역 입구에는 여러 케밥 가게가 포장마차처럼 줄지어 있습니다만, 아무 곳이나 골라서 먹기 간편해 보이는 박스 메뉴를 시켰습니다. 날이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 얼른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별생각 없이 시킨 메뉴였습니다. 하지만 이 날 케밥 첫 시도 이후 비엔나의 수많은 케밥 가게를 돌아다니고, 박스 외에 다른 종류의 케밥 메뉴-빵 사이에 끼워 먹는 기본 메뉴 도너 케밥(Doner kebab), 얇은 랩에 싸 먹는 뒤룸(Durum)-들을 먹어봐도 이때만큼 맛있는 케밥은 찾을 수 없었어요. 듬뿍 들어간 짭짤하고 부드러운 닭고기, 자취생이 한 끼에 다 챙겨 먹기 힘든 양상추나 양파, 토마토 같은 채소들, 유럽 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그리워지는 고슬고슬한 쌀밥, 새콤한 요거트 소스와 매콤한 핫소스까지.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날 이후로 케밥, 그중에서도 박스 케밥은 저의 교환학생 생활 소울푸드가 되었습니다. 도너 케밥은 쫀쫀하고 든든한 빵이 정말 맛있고, 뒤룸은 얇은 피데(Pide)와 속재료들을 한 입에 먹는 식감이 아주 좋지만, 그래도 밥이 들어있는 박스 케밥이 제 입맛에는 딱입니다. 곧이어 도착해 제 손에 이끌려 같은 케밥을 먹었던 친구는 제가 이 얘기를 할 때마다 '사실 그 정돈 아니었지만, 그 날따라 춥고 배고파서 더 맛있게 느껴진 것'이라고 주장하곤 해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케밥이 특히나 교환학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 되는 이유는, 맛있으면서도 가격 역시 굉장히 저렴하다는 매력 덕분에 자주 손이 가기 때문입니다. 한 끼 해결에 만 오천 원이 뚝딱 넘는 비엔나 외식 물가 사이에서, 오천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케밥은 무엇보다 만만하고도 친근합니다.
가장 맛있고 가장 흔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것이 아닌
비엔나에는 많은 케밥집만큼이나 많은 터키인이 살고 있습니다. 유럽 생활에서 뗄 수 없는 케밥 역시 사실 터키의 음식인지라, 케밥집에 갈 때마다 터키인 사장님들께서 반겨주시곤 하죠. 유럽과 아시아가 마주하는 곳에 자리한 나라 터키에서 출발한 케밥 요리는, 오랜 시간을 거쳐 두 대륙의 문화와 합쳐지고 또 변화해 지금의 케밥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케밥은 동양적이기도 하고 서양적이기도 한 음식이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어떨 땐 볶음요리 같기도, 어떨 땐 샌드위치 같기도 하니까요.
비엔나에서 가장 맛있고 가장 흔한 길거리 음식인 케밥이 오스트리아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편으론 흥미롭습니다. 사실 오스트리아엔 이렇다 할 특색 있는 전통 요리가 없습니다. 립이나 슈니첼, 굴라쉬가 오스트리아 요리로 오르내리곤 하지만 한식이나 일식처럼 특징이 뚜렷하거나 레퍼토리가 방대하진 않죠. 그래서 그런지 저도 비엔나의 요리, 하면 케밥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추운 날 노점 앞에 서서 먹던 박스 케밥, 집으로 배달시켜서 영화를 보며 친구와 먹었던 뒤룸 케밥, 아침 러닝 후 멈춰 선 곳 근처에서 테이크아웃해 어느 공원에 앉아먹었던 도너 케밥들이 기억의 사소하고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케밥처럼 비엔나를 닮아가기
마침 제가 머무르는 기숙사 근처에는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케밥집이 있습니다. 가끔 지나가다 보면, 가게 앞에서부터 늘어진 대기줄이 골목 끝까지 나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케밥 가게입니다. 그만큼 케밥은 비엔나 사람들도 좋아하고 즐기는 요리 중 하나입니다. 오스트리아 음식이 아닌데도, 먼 거리를 넘어 오랜 시간을 거쳐 이곳 비엔나에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대견하기까지 합니다.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지만 이곳에 살아가는 저는, 어쩌면 케밥을 보며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비엔나의 어느 좋은 부분을 닮아 나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이 되어갈 수 있겠지요? 한국에 돌아가면, 비엔나 길거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먹었던 케밥이 너무너무 그리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