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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 Jan 06. 2021

하루에 좋은 일 하나씩 꺼내먹기

크리스마스 어드벤트 캘린더


모두가 기다리는 날이 있습니다. 나는 10월부터 때 이른 캐롤을 틀고, 모퉁이 상점에서 전구를 사다가 작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거리에 하나둘 조명이 채워지고, 마트 진열대에 알록달록한 산타 모양 초콜릿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따끈한 펀치를 한 손에 든 사람들이 길가에서 모락모락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어느새 12월입니다. 락다운이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비록 크리스마스 마켓은 없지만, 비엔나의 겨울 거리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슈테판 쪽 거리나 라트하우스 앞을 걸으며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조명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왜 그토록 기다려질까요? 내 생일도 아닌 데다가,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닥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요. 사실 크리스마스 당일보다는 오히려 그 날을 기다리는 설렘이 더 재미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거리를 단장하고 분주하게 집을 꾸미는 12월도 설렘으로, 그런 12월을 기다리며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는 11월도 설렘으로 가득 찹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갑습니다.



유럽에서는 어드벤트 캘린더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곤 합니다. 1부터 24까지의 숫자가 쓰여있는 네모난 상자 모양 달력으로, 보통 한 칸에 작은 초콜릿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어드벤트 캘린더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합니다. 12월 1일부터 하루에 딱 한 칸씩만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번 칸이 궁금하다고 미리 열어서 먹어버리면,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어느 하루에는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규칙을 잘 지켜 1일에는 1번 칸, 2일에는 2번 칸 이런 식으로 열다 보면 크리스마스 이브날 마지막 칸까지 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와 있는 거죠.


어드벤트 캘린더는 제가 본, 무언가를 기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한입짜리 초콜릿이지만, 매일매일 다른 맛과 모양이 나오기 때문에 다 먹고 나면 '내일은 어떤 초콜릿일까?' 괜히 궁금해지곤 해요. 나중에는 얼른 초콜릿이 먹고 싶어 아침에 침대에서 더 뒹굴지 않고 바로 일어날 정도로, 내일이 기다려지는 사소하고도 행복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수험생 때, 그 날 하루 일어났던 좋은 점 3가지를 친구와 매일 문자로 주고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야자가 끝나고 조용한 밤골목을 지치고 외로운 마음으로 걸어갈 때, 오늘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찾아 휴대폰 자판으로 꾹꾹 눌러쓰는 것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이 하나도 없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찾다 보면 '오늘도 아프지 않았다' 등의 말들을 적어낼 수 있었습니다. 잠도 부족하고, 즐거운 일들은 아득하기만 하고, 긴 터널의 암흑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인생의 가장 힘든 시절을 버텨내는 우리들만의 의식이었어요. 좋은 점을 적다 보면 정말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오늘 좋은 일이 3가지나 일어났다는 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하찮을지언정 좋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걸, 우리는 1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꾸준히 주고받은 문자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어드벤트 캘린더의 작은 칸들을 하나하나 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좋은 점들을 쓰던 수험생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하루를 버티기 위해 때로는 좋은 일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다시 읽어보며 천천히 꺼내먹던 그때가요. 나는 비엔나의 정든 방에서, 오늘도 어드벤트 캘린더를 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이제는 한 달 남짓 남은 비엔나를 떠나는 날을 카운트다운합니다. 슬프고 아쉬운 날이지만 이제는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쁘고 삭막한 세상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럽고 어색하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매 순간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맙게도 좋은 점 3가지와 어드벤트 캘린더는 모두 나에게 사소하고 꾸준한 오늘의 행복이 되어주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행운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행복은 하루 세 끼 밥처럼 요리해서 자꾸 스스로에게 먹여야 하는, 일종의 장치가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에게 오늘도 행복한 일 하나를 먹이는 것은 얼마나 꾸준하고 좋은 일인가요. 내일은 또 무슨 맛의 초콜릿을 꺼내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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