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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 Jan 29. 2021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비엔나 커피와 아인슈페너, 멜랑지에 대하여

비엔나 3대 카페 중 Cafe Sacher의 자허 토르테(왼쪽)와 아인슈페너(오른쪽)


비엔나에 가기 전부터 유난히 비엔나 커피를 좋아했습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서울의 개인 카페에 가면 늘 시키던 단골 메뉴였죠. 찻잔 위에 작게 얹어진 파스텔톤의 머그잔, 그 안에 담겨 나오는 따뜻하고 진한 아메리카노와 달달한 생크림은 커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가끔 찾곤 하는 매력적인 조합입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생크림을 신경 쓰지 않고 커피 먼저 몇 모금 마시다 보면 크림이 자연스레 녹아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비엔나 커피에 반하게 되었죠.


비엔나로 교환학생을 간다고 했을 때의 친구들의 반응은 '비엔나 커피'를 통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엔나 커피 많이 먹을 수 있어서 좋겠다' 부류와, '비엔나 커피는 한국이 더 맛있어' 부류인데요. 비엔나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후자의 말을 썩 믿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원조가 더 맛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상외로 비엔나의 카페 메뉴판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엔나 커피'가 없습니다.


오페라 극장 근처 Cafe Mozart의 메뉴판


눈치채셨나요? 우리가 말하는 비엔나 커피의 진짜 이름은 '아인슈페너'입니다. 한국에서도 카페마다 비엔나 커피라고 부르는 곳이 있고, 아인슈페너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사실 이 둘은 (우리에겐) 같은 메뉴입니다. 아인슈페너(Einspanner)란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라는 뜻인데요. 옛 비엔나의 마부들이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도 커피를 흘리지 않고 마시기 위해 커피 위에 꾸덕한 크림을 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모던한 카페들보다는, 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비엔나의 오래된 카페들에서 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의 아인슈페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엔나 커피와는 또 많이 다릅니다. 유럽에 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 자허(Sacher)에 가서 아인슈페너 한 잔과 자허 토르테를 시켰던 여름날을 떠올려 볼게요. 한국과 달리 아이스 아인슈페너가 없어서 핫을 시켰는데, 긴 유리잔에 담겨 나오는 것부터가 정말 독특했어요. 유리잔에 뜨거운 커피라니! 처음에는 실수인가 했지만, 비엔나 어디에서 아인슈페너를 시키더라도 유리잔은 빼놓을 수 없는 짝꿍입니다. 크림 역시 생크림이 아니라 휘핑크림이고 달지 않아요. 에스프레소와 섞어먹을 때의 달달함은 느낄 수 없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생크림보다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식감이 좋습니다. 달달한 맛을 원한다면 함께 주는 설탕을 퐁당 넣고 녹여마시면 되거든요.


이렇게 놓고 보니 비슷하긴 해도 같은 메뉴라고 하기에는 조금 차이가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비엔나 커피란 한국에만 존재하는 셈입니다. 마치 '비엔나 소시지'라고 하면 우리는 줄줄이 소시지를 떠올리지만 정작 비엔나에는 그런 소시지가 없다는 것과 비슷하네요. 비엔나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오스트리아인 친구에게 해준 적이 있는데요.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라는 메뉴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아인슈페너를 즐겨 먹는 비엔나 사람들 역시 드문데도, 한국에서는 비엔나 커피가 많은 카페들의 인기 메뉴라는 사실에 재미있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비엔나 3대 카페 중 Cafe Central의 카푸치노(위)와 멜랑지(아래)


대신 비엔나에는 '멜랑지(Melange)'가 있습니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동안 비엔나에 살며 많은 커피를 마셔본 결과, 진짜 비엔나를 대표하는 커피는 멜랑지가 아닐까 해요. 멜랑지는 정식 이름부터 '비엔나의 멜랑지(Wiener Melange)'로, 카푸치노와 비슷하게 따뜻한 스팀 라떼 위에 우유 거품을 넉넉하게 얹어 만든 커피입니다. 생긴 걸로 보나 맛으로 보나 카푸치노와 크게 구분은 못하겠지만, 가끔 비엔나식 브런치를 먹을 때 멜랑지를 시키면 에스프레소와 우유 스팀을 따로 주는 게 신기하기도 했죠.


추운 날 멜랑지가 가득 든 머그컵을 들고 비엔나의 어느 카페 구석에 앉아 있으면 기분이 참 포근합니다. 이제 저에게 '비엔나 커피'라고 하면 아인슈페너와 멜랑지가 동시에 떠올라요. 한국의 비엔나 커피처럼, 어떤 것들은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흘러가는 과정에서 변하기도 하고 완전히 생뚱맞아지기도 합니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 여전히 비엔나보다는 한국의 아인슈페너가 더 맛있게 느껴지니까요. 저는 오늘도 그런 우연한 변화들이 반갑고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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