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행성 Feb 10. 2021

쇤부른의 어느 언덕에서

늘상 에움길이라 좋았습니다


여행을 가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름 모를 어느 언덕에서 어느새 나의 손톱만큼 작아진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쇤부른 궁전에는 언덕이 하나 있습니다. 언덕 위 문을 열지 않는 레스토랑은, 궁전 건물보다도 발이 자주 닿는 곳이었습니다. 그 언덕에 가기 위해 버스를 갈아타고 쇤부른 궁전을 찾아갈 때는 맑은 날이 참 많았습니다. 한 왕가의 여름 궁전이었지만 한편으론 눈 내리는 날이 가장 예쁘다던 곳이었습니다. 나는 언덕을 오르면서, 노란 건물에 하얀색을 입혀보며 자주 눈 내리는 쇤부른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높은 곳에 닿는 길은 늘상 에움길이라 좋았습니다. 언덕에 오르는 길은 한 번도 체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빙 둘러와도 된다고 허락해줄 수 있는 존재는 내 삶에 얼마나 될까요. 궁전 건물을 등 뒤에 세워두고, 에둘러 난 길을 따라 왼쪽으로 한참 걷다 오른쪽으로 다시 한참 걸어봅니다. 숨이 턱끝에 찰 무렵마다 고개를 돌려보면, 걸어온 시간만큼 작아지고 멀어진 건물과 거리들이 꼭 다른 세상처럼 느껴집니다. 나 역시 그곳 어딘가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립니다. 비엔나보다 큰 키가 되어 마주 서있으면 조용히 눈인사를 하기 좋습니다. 평범한 거리의 평범한 자동차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걸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에겐 여행지가 누군가에겐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거라고. 이 언덕을 내려가 다시 도시의 일부가 되면 나도 손톱만큼 작고 느린 사람일 뿐이라고.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말해주는 일은, 다시 역설적이게도 큰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나는 쇤부른의 언덕을 자주 좋아합니다. 노을이 지고 언덕을 내려오는 길은 잔잔히 어둠이 깔립니다. 어둑해져 꼭 미로 같은 쇤부른의 길들 속에서 나는 때때로 헤매고 싶어 지기도 합니다.


이전 09화 300m에서 4km가 되기까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