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행성 Feb 16. 2021

300m에서 4km가 되기까지

유럽에서 러닝하기


사소한 러닝의 출발점


유럽에서 러닝을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선선하고 햇살이 폭넓게 드는 날을 골라 도나우강을 따라서 천천히 뛰다 보면, 주변 모든 것이 잔잔하고 느긋해보입니다. 놀이공원 바로 옆에 자리한 프라터 공원은 스무 명이 한 줄로 뛰어도 될 만큼 폭넓은 도로가 끝도 없이 뻗어 있어, 낯선 사람들과 함께 뛰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못을 따라 한 두 바퀴 가볍게 뛸 수 있는 시민공원은 볼거리가 많아 재미있게 뛸 수 있던 장소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것은 거의 매일 뛰었던 집 앞 단골코스입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기숙사 문 앞에서부터 뛰기 시작하면 이내 시청을 지납니다. 그 후 폭스가르텐(Volksgarten)을 딱 두 바퀴 뛰고서, 왔던 길을 돌아 달려가면 정확히 30분 만에 다시 기숙사 문 앞에서 끝나는 코스입니다.


살갗 위로 땀줄기가 흐르는 기분이 싫어 운동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불과 1년 전 활동하던 학회에서 누군가 '러닝의 즐거움'에 대해 발표했을 때, 나는 평생 저 친구처럼 뛰지는 못할 거라고 한 끝의 의심도 없이 스스로를 재단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변화의 시작이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요?


비엔나는 도시임에도 공기가 좋습니다. 굳이 차도 사람도 없는 새벽을 고르지 않더라도, 편한 옷을 갖춰 입고 가벼운 신발을 신고 아무 때나 기숙사를 나서면 산속에 온 것처럼 맑은 공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창문 너머로는 다 알 수 없었던 오늘의 우연한 날씨 안에서 온몸으로 헤엄치는 기분이 듭니다. 그 친밀함이 좋아 자꾸 달렸습니다.




여행 아니면 성장


러닝도 여행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뛰다 보면, 평소에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작은 골목들에 발길이 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 수 없었던 숨겨진 맛집도 발견하고, 저 같은 길치에게는 집 근처 지리를 자연스레 익히는데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러닝을 좋아했던 이유는, '일주일 전보다 더 튼튼해진 나'를 실감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세 달을 꾸준히 뛰다 보니 이제는 30분을 거뜬히 달립니다. 300m가 1km가 되고, 1km가 이내 4km가 되기까지. 열 배의 성장을 이뤄내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나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소 불공평한 이 세상에서 러닝이라는 종목은 꾸준히, 열심히만 뛴다면 꼭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고마운 운동입니다.


성장하는 나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한 회사의 인턴 면접을 봤을 때, 사람들은 왜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성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저 당연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제의 나로서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 왔으니까요.


어쩌면 '당연하다'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몸이 자라는 게 당연하듯, 그냥 본능적으로 자라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요. 성장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철학적으로 조금 과장해보자면, 성장은 인간의 존재 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요. 그러니 '어제보다 더 오래 달리는 오늘의 나'는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한 21세기에 큰 실용적 의미는 없을지언정, 성장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속도보다는 멈추지 않기


러닝에는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빨리 뛰는 것보다는 멈추지 않고 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곳 비엔나에는 러닝을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서,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뛰는 고수들을 보고 있자면 느릿하게 뛰는 내가 안이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뛰더라도, 일정한 페이스로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게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러닝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의 속도를 찾게 되고, 그 속도로 쉬지 않고 뛰는 일에 적응하게 되고, 조금씩 속도를 끌어올려 성장할 수 있게 되겠죠.


이 법칙은 내가 러닝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러닝의 법칙이 인생사의 모범답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들보다 빠르게, 남들보다 더 앞서 나가야 하는- 가끔은 숨이 차는 이 세상에서, 속도보다는 한결같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일은 그 자체로 묵묵한 위로가 되곤 합니다.



이전 08화 어서 오세요, 입구는 0층에 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