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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Aug 12. 2021

성냥팔이 소녀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성냥팔이 소녀]

 “쥐새끼 같은 것.”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소녀를 그렇게 불렀다. 쉴 새 없이 눈치를 살피며 몰래 먹을 걸 훔쳐 먹는 꼴이 아무 데나 오줌을 휘갈기고 다니는 쥐새끼랑 똑같다며 혀를 찼다. 

“저런 말을 들으면 귀를 씻어야 해. 말 같지 않은 말은 잊어버려라. 들을 가치도 없어.”

 차를 끓이려던 물을 덜어 살살 귀에 묻혀주던 할머니가 이젠 없었다. 소녀는 잿빛 행주로 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대부분 취해 있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었다. 아버지는 동냥질이라도 해 술을 더 사오라며 소녀를 내쫓았다. 성냥갑 몇 개를 주워 들고 거리로 나온 소녀는 신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엄마가 두고 간 신발은 지나치게 커서 걸을 때마다 자꾸 벗겨졌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날벌레 떼 같은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손과 발이 꽁꽁 얼어 벌겋게 부어올랐다. 계절에 맞지 않는 얇은 옷을 입고 절뚝절뚝 걷는 소녀를 보며 몇몇 사람들이 쯧쯧 혀를 차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도 소녀에게 말을 걸진 않았다. 두 손에 선물과 케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성가신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 부르튼 손등이 벗겨지도록 문질러대던 소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불쑥 지나가는 행인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갔다. 

“아무도 성냥 같은 건 사지 않아요. 그렇죠?”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들이밀며 물었다. 소녀가 말을 건넨 사람은 반듯한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였다. 그는 소녀의 더러운 손을 보더니 황급히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 지갑을 뒤져 1센트짜리 동전 두 개를 던져주고는 도망치듯 재빨리 걸어가 버렸다. 소녀는 손바닥에 떨궈진 동전 두 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1센트로 기분 좋아지는 방법 아니? 혀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디 단 사탕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 거야. 잘게 부스러진 사탕 조각들이 입 안에 굴러다니도록 내버려두렴. 부스러진 달달한 것들이 입 안 가장 여린 살을 찌르도록 내버려 둬. 그 정도의 고통은 아주 기꺼울 테니까.”

 할머니가 몰래 하나씩 입에 쏙 넣어주던 제비꽃 사탕이 떠올랐다. 소녀는 잠깐 두리번거리다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돋보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색색의 사탕들이 들어 있는 통을 기웃거리자 사색이 된 가게 주인이 달려왔다.

“얘! 만지면 안 돼. 어른들은 어디 갔니?”

 가게 주인이 사탕 통을 들어 뒤로 숨기며 보호자가 있는지 살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경찰을 부르려는 것 같았다. 소녀는 쥐새끼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다른 통에 든 젤리빈 한 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꽉 쥐고 있어 따끈따끈해진 동전 두 개를 집어 던졌다. 

 소녀는 달리고 달렸다. 마구 내달리다 마차에 치일 뻔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뒤에서 어떤 여자애가 소녀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소녀는 불빛이 없는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리는 거리는 소녀를 숨겨주지 않았다. 여긴 네가 있을 데가 아니라고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황홀한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 곳, 근사한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없는 곳, 초라하고 궁핍한 곳. 

‘그런 곳이 나에게 어울려.’

 소녀는 그런 생각들을 이어나가다 이내 시무룩해졌다. 그런 허튼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코끝을 살짝 눌러주던 할머니가 없어서인지, 그 생각이 진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눅눅해진 젤리빈이 손바닥에 달라붙어 질척거렸다. 오들오들 떨던 소녀는 그걸 한입에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끈적끈적하게 이 사이로 엉겨 붙는 젤리는 아득하게 달았다. 소녀는 깨진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았다. 땀이 식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매서운 바람에 온몸이 조각조각날 것 같았다. 소녀는 품에서 성냥 한 개비를 꺼냈다. 탁탁 불을 붙이자 작고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기엔 너무 초라한 빛이었다. 추위를 이기기에도 너무 미약한 빛이었다. 

“있지 할머니, 나 너무 추워. 할머니한테 가고 싶어.”

 소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러봤다.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주름진 손, 휘어진 눈매, 걸걸한 웃음소리 같은 게 어렴풋이 떠오르다 촛농에 뭉개진 것처럼 지워졌다. 성냥 하나를 더 꺼냈다. 어룽거리는 불빛 사이로 찬찬히 머리를 쓸어주던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 옅게 웃던 모습 같은 것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빠르게 꺼져드는 성냥 따위로는 어떤 기억도 오래 붙들어둘 수 없었다.

 소녀는 좋은 상상들을 하고 싶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양파 수프, 오븐에 오래 구워 노릇노릇해진 로스트 치킨과 달콤한 쿠키들. 자잘한 알전구들이 사랑스럽게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상상들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쉽게 부스러지고 마는 설탕 조각처럼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죽은 쥐와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 곰팡이 핀 빵 같은 것들이 소녀에겐 더 익숙했다. 

 소녀가 몇 개 남지 않은 성냥개비들을 또각또각 분지르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야! 너 왜 이렇게 빨라? 달리기 선수해도 되겠네.”

 누군가 숨을 몰아쉬며 어두운 골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까 뒤에서 소녀를 부르던 여자애였다. 

“이거 가져가야지. 근데 너 발이…….”

 신발 한 짝을 내밀던 여자애가 멈칫했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의 맨발을 보며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낯선 여자애를 살피던 소녀는 벌떡 일어나 신발을 낚아챘다. 타고 남은 성냥개비들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괜찮아? 너무 심하게 떠는데. 아, 이거 줄까? 새 아빠가 떠준 건데 따뜻해. 난 다시 떠달라고 하면 돼.”

 여자애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목에 매고 있던 두툼한 털목도리를 소녀에게 둘러줬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던 소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목도리가 너무, 보드랍고 따뜻했다. 소녀는 빨간색 목도리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멀리서 누군가 여자애의 이름을 불렀다. 쥐새끼 따위가 아닌, 아주 평범한 이름을. 

“널 찾는 것 같은데.”

 소녀가 간신히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 

“음, 급하게 쫓아왔거든. 신발을 한 짝만 신고 걸어 다닐 순 없잖아. 있지, 그…. 우리 집에 안 맞는 신발 있는데. 너 줄까?”

 여자애가 머뭇머뭇 말을 고르고 고르다 물었다. 소녀는 잘 손질된 여자애의 머리칼과 깨끗한 옷차림과 구멍 나지 않은 신발을 바라봤다. 분명 그냥 해 보는 말일 텐데, 어째서인지 선뜻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네가 너를 지켜야 해.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지. 그러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멀리 멀리 달아나렴. 아니면 누구라도 붙잡고 도와달라고 해.” 

 왜일까. 순간 뿌옇게 흐려졌던 할머니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방문 잠그는 방법을 알려주며 할머니는 소녀의 야윈 뺨을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왜 할머니는 그러지 못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소녀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리하고 용감한 내 사랑.”

 할머니는 소녀를 그렇게 불렀다. 딱 한 번. 죽기 전에. 더 자주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 앨 따라갈까? 따라가서 도와달라고 할까?’

 소녀는 여자애의 모습을 다시 샅샅이 훑어봤다. 두툼한 스웨터와 초록색 솜바지는 세탁이 잘 되어 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입었는지 팔꿈치며 무릎 튀어나온 부분 같은 데가 헹글했다. 반질거리는 에나멜 구두는 그 애의 발에 꼭 맞았지만 앞코가 닳아 있었다. 

‘하룻밤. 하룻밤 정도는….’

 소녀는 제 마른 팔과 창백해진 얼굴 위로 자꾸만 떨어졌다 금세 녹아버리는 눈송이를 의식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야 마땅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거슬리는 실금 같은 역할을 하고 싶진 않았다. 목도리 값으로 민폐를 지불하고 싶진 않았다. 

“가야 할 데가 있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소녀가 말했다. 여자애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추운데. 조심해서 가. 다치지 말고.”

여자애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소녀는 목도리를 꽉 쥐고 돌아섰다. 

‘다시 떠 줄 사람이 있으니까. 이건 받아도 괜찮겠지.’

 소녀는 발에 맞지 않아 헐떡이는 엄마 신발을 신고 절룩절룩 걸었다.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몇 발짝만 나가니 다시 눈이 멀 것처럼 화려한 빛이 쏟아졌다.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려면 환한 곳으로, 더 환한 곳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소녀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칭칭 감아 맨 목도리를 곱아든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소녀는 걷고 또 걸었다. 멀리 집이 보였다. 지붕 말고는 불어대는 바람을 가릴 것도 없는 집이었다. 가까이 가니 거나하게 취해 비척비척 걸어 나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쥐새끼 같은 것. 지지리도 말을 안 듣지. 술 사오라니까 어디로 내뺀 건지.”

 자그맣게 몸을 말아 숨은 소녀는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하염없이 되풀이되는 아버지의 욕설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세상은 삽시간에 어둡고 조용해졌다. 소녀는 남은 성냥들을 몽땅 꺼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고요히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소녀는 그것을 집 쪽으로 휙 던졌다. 매섭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타고 불길이 확 번졌다.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든 집은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다. 성냥개비들에서 시작 되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불이었다. 

“불이야! 불이야!”

 사방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놀라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건지 저만치 나동그라져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집이 이렇게 따뜻한 건 처음이에요, 아빠. 그렇죠?’

 소녀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리하고 용감한 소녀는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야 할 말을 하기로 결정했다. 소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소녀는 더 이상 한낱 쥐새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거룩한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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