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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Feb 28. 2023

4. 드디어 태권체조 팀

4. 드디어 태권체조 팀


무더운 낮곁이었다. 해가 제일 높게 떠 있을 때라 사방이 빛에 잠긴 것처럼 쨍했다. 연습을  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모인 아이들은 연신 손부채를 부쳐 댔다. 

“아,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음악이랑 잘 안 맞네. 다시 한번 해 보자.”

이나랑 서하는 전날 짜 온 안무를 먼저 같이 맞춰 봤다. 영상으로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따라 하려니 좀처럼 뜻대로 되질 않았다. 순서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 온 안무 동작들을 힐끔거리며 둘은 허둥거렸다. 차례를 기다리며 그네에 앉아 고구마 맛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먹고 있던 진아 언니가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하이고, 인원수 다 모이면 연습하자며? 주말에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날이 더워 가만있어도 땀이 주룩 흐르는데, 솔개그늘도 없는 운동장에서 연습 순서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짜증이 날 만했다.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 불평을 하는 진아 언니를 보며 이나가 좀 봐주라는 듯 비는 시늉을 했다. 

“아니이,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준비를 해 놔야 나중에 헤매지 않지.”

“헛, 참 나. 그러기엔 이미 엄청 무지막지 헤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진아 언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나가 짜 온 안무를 훑어봤다. 서하가 편집해서 보내 준 영상들을 이미 보고 온 상태였지만 이게 뭔가 싶었다. 스케치북을 북 찢어 되는대로 그려 놓은 그림을 용케 알아보는 게 용했다. 개발새발 멋대로 그려진 안무를 보니 더 어지러웠다. 

“너넨 이게 눈에 들어오냐? 기가 막힌다, 진짜. 이러니 진도가 안 나가지.”

진아 언니가 혀를 쯧쯧 찼다. 이나랑 서하는 멀뚱히 서로를 바라봤다.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둘은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거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너네끼리도 잘 못 알아보고, 같이할 나도 아예 못 알아보고. 뭐 다른 애들이 들어온다고 이걸 알아보겠냐?”

진아 언니의 말을 들으니 이나는 새삼 현실이 자각되었다. 인원을 모아 함께할 거라고 떠들어 댔지만, 막상 거기에 대한 대비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인원을 모아도 서로 소통이 안 된다면 연습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땅한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쌔무룩해져 신발 앞코로 모래를 파고 있는 이나를 보며 진아 언니도 답답했는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미끄럼틀 쪽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던 름이가 슬며시 다가왔다. 구경이나 오라는 이나와 서하의 닦달에 마지못해 끌려 나왔지만, 평소처럼 말없이 한쪽에 동그마니 앉아만 있던 름이었다. 

“이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봐 볼래?”

주저하던 름이가 스케치북을 건넸다. 거기엔 이나와 서하가 내내 동동거리며 연습했던 동작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나가 간략하게 휘갈겨 그린 그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휘날리는 도복 자락의 주름까지 섬세하게 잡아낸 걸 보고 세 명 다 감탄을 했다. 지르기, 발차기 동작들을 보다 명확하고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순서에 알맞게 번호까지 매겨 놓아 더 손볼 데가 없었다. 

“이얏! 름이 름이 구름이! 진짜 유용하구만!”

흥분한 서하가 름이를 번쩍 치켜들더니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서하가 그대로 들어 올리자 름이는 후루루 따라 올라갔다. 억 소리도 못 내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름이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야, 야. 그만해. 애 잡겠다.”

진아 언니가 얼른 나서서 서하를 말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하가 름이를 내려놓고 멋쩍은 듯 코를 훌쩍였다. 애써 숨을 고르는 름이와 민망해하는 서하를 번갈아 보며 이나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큭큭거렸다. 

“날도 더운데 허튼짓 그만하고 얼른 연습하고 해산하자. 아이스크림 쏘는 거 잊지 말고.”

진아 언니가 이제 정리하자는 듯 애들을 불러 모았다. 이나랑 서하는 빠릿빠릿하게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때 름이가 머뭇머뭇 물었다. 

“있잖아, 혹시…… 나도 너희 팀 들어가도 돼?”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셋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그 말 진짜야?”

이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듭 물었다. 재밌어 보이면 들어오라고 닦달하긴 했지만, 름이가 정말로 그런 결정을 할 거라곤 다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석진 데를 제일 좋아하고, 나서는 걸 싫어하고, 태권도도 억지로 다니는 애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한 건지 궁금했다. 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음, 태권도는 무조건 세게 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춤은 다른 것 같아. 부드럽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묘해. 뭐랄까. 조금만 더 알아보고 싶어.”

평소보다 훨씬 길게 말을 한 름이의 얼굴이 또 발갛게 물들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목을 움츠리며 조촘 물러났다. 이나랑 서하는 그러든 말든 신이 나 름이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 모양새를 보고 진아 언니가 못 말린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 명이라니! 이제 두 명만 더 모으면 돼.”

기대감에 부푼 이나가 공중에서 제비돌기를 두 바퀴나 하며 자축을 했다. 축구장에서나 볼 법한 요란한 세리머니에 모두 키득거렸다. 그때 저 뒤쪽에서 “우우.” 하는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푸드득 푸드득! 날갯짓이 요란하기도 하다, 강이나. 비둘기들이 여기 다 모여 있네. 아예 날아가지 그러냐?”

배배 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게 거슬리는 그 목소리에 이나가 도끼눈을 뜨고 돌아보니 세찬이가 후후 쌍둥이들과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만치서부터 빈정거리며 다가오는 세찬이를 보는 이나의 표정이 꾸겨졌다. 욱하려는 순간, 진아 언니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말 가려 하지? 쪼그만 게. 위아래도 없냐?” 

물렁물렁해 보이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은 진아 언니가 당장에 경고를 날렸다. 바짝 날 선 진아 언니의 어투에, 거리낄 것 없어 보이던 세찬이가 움찔했다. 이나를 겨냥한 놀림이었지만 한 학년 위인 진아 언니도 끼어 있었으니 뜨끔하긴 했을 것이다. 위계질서를 흐트러트리는 애들은 용납할 수 없다고 관장님이 누누이 얘기해 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관장님 말에는 꼼짝 못 하는 세찬이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누나한테 한 말 아니거든?요.”

애매하게 존댓말을 붙이며 발을 빼는 세찬이를 보며 서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야, 지세찬. 비겁하게 실력으로 안 되니까 시비나 걸고. 한심하다, 한심해. 제발 그냥 가던 길이나 가 줄래?”

껑충 키가 큰 서하가 세찬이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꼭 세찬이가 서하를 가까스로 올려다보고 있는 모양새가 그려졌다. 

“이 기린 같은 게!”

세찬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응, 그래. 나 기린 좋아해. 놀릴 게 그것밖에 없니? 더 없어?”

서하가 싱긋 웃으며 받아치자 이번엔 이나가 뒤에서 깔깔거렸다. 괜스레 와서 시비를 걸었다가 도리어 당하자 세찬이는 분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도장이었다면 다른 애들을 불러 모아 패거리라도 만들어 거들먹거렸을 텐데 텅 빈 운동장에서는 그러기도 힘들었다. 딴짓만 하며 뒤따라오던 후후 쌍둥이는 뭐에 또 마음이 동한 건지 어느새 름이 옆에 가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후후, 너넨 뭘 보고 서 있어? 얼른 오라고.”

세찬이가 그악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발을 쾅쾅 굴렀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 화가 난 네 살짜리 꼬마 같았다. 후후 쌍둥이는 똑같이 뒷머리를 긁더니 코를 한 번 후비고 세찬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 오늘 너네 집 못 가겠다. 그냥 여기서 놀래.”

“미안, 세찬이. 이게 더 재밌어 보여.”

시후랑 지후가 름이 옆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골똘히 스케치북을 들여다봤다. 짓궂고 부산스러운 두 아이가 웬일로 진지하게 그림을 넘겨 보고 있었다. 이나랑 서하가 태권체조 시범을 보였던 날 결석을 했던 후후 쌍둥이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름이의 스케치를 넘겨 보았다. 

“이거 춤이야? 이 동작이랑 이 동작이 이어진단 말이야?”

시후가 손가락으로 동작들을 짚어 보며 꺄웃거렸다. 

“오호, 그럼 이 동작은 이렇게 하는 건가?”

지후가 벌떡 일어나더니 아까 이나가 연습했던 것처럼 뒤돌려차기와 찍어차기, 양손날막기를 연달아 이어서 해 보였다. 어설프긴 했지만 제법 매끄러웠다. 그걸 본 시후는 엄지와 중지를 붙여 딱 소리를 내더니 자기도 벌떡 일어나 그걸 따라 했다. 

“오오, 잘하네. 있지, 그거 음악이랑 같이해 보면 더 재밌다?”

이나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세찬이를 내버려 두고 후후 쌍둥이 옆으로 빠짝 다가갔다.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가느스름한 눈을 하고 “후훗.” 하고 나지막하게 웃으며 빠르게 영상을 보여 줬다. 예상대로 후후 쌍둥이는 그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 나도 이거 해 볼래!”

후후 쌍둥이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이나랑 서하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환영한다는 뜻이었다. 

“너네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우리 집 가서 겨루기 연습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잖아!”

세찬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봤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후후 쌍둥이는 한쪽 귀를 후비며 콧잔등을 긁적였다. 

“아니, 그건 싫다는데 네가 억지로 끌고 온 거잖아.”

“맞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보기만 하라며.”

태평한 쌍둥이들의 대답에 세찬이는 말문이 막히는지 더 대꾸하지 못했다. 후후 쌍둥이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굴 때가 많아서 평소에는 세찬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 주는 편이었지만, 한번 꽂히는 게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같이 다녔던 세찬이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둘 다 이미 머릿속이 태권체조로 가득 찼을 게 뻔했다. 이나를 한번 약 올려 보려다 크게 덴 꼴이었다. 일이 꼬이자 세찬이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이나를 중심으로 모인 애들이 다 적으로 보이는지 표정이 이지러졌다.

“하! 그래. 니들 맘대로 해 봐, 어디. 안 봐도 뻔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하겠지. 대회를 나가? 관장님이 그걸 허락할 것 같아?”

이나와 서하, 진아 언니, 름이, 시후, 지후. 얼기설기 팀으로 엮인 여섯 명을 차례대로 쏘아보던 세찬이가 픽 돌아섰다. 그러곤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 버렸다. 악담을 쏟아내고 가 버린 세찬이 때문에 운동장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이나는 곧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다른 애들도 볼을 긁적이거나 하품을 하거나 딴청을 피웠다. 진아 언니는 끝까지 버르장머리 없이 굴고 멀어져 가는 세찬이를 흘기며 “저걸 콱 그냥.” 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이나는 그런 진아 언니를 달래며 진정하라고 아까 먹다 남은 고구마 맛 과자를 입 안에 쏙 넣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 한 팀이 된 다른 애들을 한데로 불러 모았다. 엄벙덤벙 모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잘해 나가 보고 싶었다. 함께 꾸려 나갈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자, 드디어 태권체조 팀이 생겼으니 앞으로 잘해 보자. 기념으로 기합 한 번 넣고!”

이나의 호령에 따라 모두가 손을 한데 포개고 기합을 넣었다. 

“어이, 어이, 어잇! 아자, 아자, 아자!”

우렁찬 기합 소리가 운동장을 울렸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손을 높이 올렸다. 쏟아지는 여름빛이 아이들을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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