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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Feb 28. 2023

5. 연! 습!

5. !


“고모, 요새 관장님이 많이 뭐라 해?”

이나는 운동화 끈을 매다 말고 슬쩍 고모를 떠봤다. 식탁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던 고모가 “뭐?” 하며 이나 쪽을 봤다. 

“아니. 태권체조 팀 꾸렸다고 하도 뭐라 하니까. 나름 몰래 연습하긴 하는데 몰래가 몰래 같지도 않고. 막 구박하거나 그러진 않아?”

이나가 우물거리며 말을 잇자 고모가 쓰고 있던 가계부를 덮고 일어났다. 그러곤 신발장 앞에 서 있던 이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나가 5학년 중에서 작은 편도 아닌데 고모는 아직도 가볍게 이나를 들어 올렸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마음 접수! 근데 고모는 ‘한 귀 한 듣’을 잘해서 괜찮아. 알지?”

“응! 중요한 말은 중요하게 듣고, 쓸데없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렇지. 네가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가 중요한 거야. 고모 신경 쓴다고 하고 싶은 일 참고 그러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해 볼게.”

고모가 이나의 코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이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히힛.” 하고 웃었다. 팀을 꾸려 틈틈이 연습을 해 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 고모가 걱정되어 마음 한편이 무겁던 이나였다. 별일이 있어도 별일이 있다고 얘기하진 않을 고모란 걸 알지만, 어쨌든 고모의 말이 위안은 되었다.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거기에 대해서라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었으니까. 

“근데 너희 연습은 잘하고 있어? 쉽지 않을 텐데.”

고모가 이나를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금방까지 히죽거리던 이나의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지난주부터 연일 헤매고만 있는 팀 연습을 떠올리자 막막해졌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막상 여섯 명이 모여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하자 생각보다 더 삐거덕거렸다. 일단 아직 서로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체력도 배우는 속도도 다 달랐는데 그걸 맞춰 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하는 안무도 잘 외워 오고 자기 방식대로 시원시원하게 동작도 소화해 냈지만, 성격이 급했다. 자꾸 다른 애들보다 앞질러 나가 버려 문제였다. 

“서하야, 제발 셋까지만 세고 움직여. 응? 다 발차기하고 있는데 너만 지금 앞지르기하고 있잖아. 응?”

이나가 아무리 일러 줘도 돌아서면 서하는 한발 앞서서 다른 동작을 하고 있었다. 

큰 동작을 잘하는 서하랑은 반대로 름이는 섬세하게 이어지는 동작들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까지 감정이 실려 있어 름이의 춤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로 앉아서 그림만 그리던 애라 그런지 체력은 형편없었다. 한 10분 움직이고 나면 20분은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름, 름아, 그…… 집에서 팔 벌려 뛰기랑 팔 굽혀 펴기 스무 개씩 하고 있는 거 맞지?”

헥헥거리고 있는 름이에게 차마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며 물으면 름이는 대답 없이 주뼛거리기만 했다. 그러면 이나가 더 머쓱해져서 땀을 삐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 번만 나오기로 했던 진아 언니를 매번 먹을 걸로 꼬드겨 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매번 못 이기는 척 연습에 나와 주긴 했지만 아직까지 딱히 큰 흥미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하게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약간 눈치가 보였다. 그리고 후후 쌍둥이. 

이나는 후후 쌍둥이를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충동적으로 들어온 시후랑 지후는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태권체조를 재밌어하는 것 같기는 한데 기억력이 꽝인 건지 둘 다 안무를 외우질 못했다. 방향을 아예 잘못 알고 외워 와 툭하면 둘이서 부딪히기 일쑤였다. 발이 꼬여 넘어지고 이마를 찧고 철퍼덕 엎어져 무릎이 까지고.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골라 놨던 음악도 후후 쌍둥이들이 질색하는 바람에 다시 정해야 했다. 그걸로 얼마나 다퉜던지.

“야, 너네 맘에 안 든다고 음악을 어떻게 바꿔?”

“어차피 안무 다 짜인 것도 아니잖아. 우리 들어오기 전에 정해진 건데 이건 무효지.”

“그럼 뭐 생각해 놓은 건 있어?”

“차차 생각해 보면 되지. 다수결로 정하자!”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라 결국 미리 정해 놓은 음악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여섯 명이 한참을 옥신각신한 후에야 새로운 음악을 다시 정할 수 있었다. 귀에 확 꽂히는 노래를 해야 인기가 많을 거라며 지후가 요즈음 제일 유행한다는 댄스 노래를 추천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다 같이 들어 보고 그 곡으로 정했다. 그런데 박자가 전보다 훨씬 빨라져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다들 정신없이 헤맸다. 후후 쌍둥이는 발이 엇박자로 꼬이고 균형을 못 잡아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킥킥거리기 바빴다. 

“어려워. 영상 보고 따라 해 보고 있긴 한데. 다들 처음이라…… 고모, 우리 나중에 시합 가까워지면 합숙 연습이라도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 허락해 줄 수 있어?”

퍼뜩 생각났다는 듯, 이나가 고모의 팔을 잡고 매달리며 물었다. 곰곰 생각하던 고모가 뜸을 들이며 대답을 미뤘다.

“생각해 보자. 당장 결정하긴 힘들고, 다른 애들 의견도 들어 봐야 하고. 보호자들 허락도 받아야 하고. 일단 접수.”

이나는 팔짝팔짝 뛰며 고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상상만 해도 신이 났다. 고모의 “생각해 보자.”라는 말은 반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계획한 대로 풀리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이런 막연한 약속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고모, 근데 나 춤에는 별로 소질이 없나 봐.”

고모에게서 떨어져 다시 운동화 끈을 마저 매던 이나가 문득 말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이, 태권도는 그냥 하면 됐는데, 이건 그냥이 없어. 팔이랑 다리랑 막 따로 놀고. 강약 조절을 하라는데 세게 팍팍 지르고 팍팍 차던 게 습관이 돼서 고쳐지질 않아.”

이나는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다른 팀원들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이나 자신의 문제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동안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권도를 해 왔던 이나였다. 사실 관장님이 이나에게 기대를 거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관장님은 이나를 국가대표로 키우고 싶어 했다. 매년 도 대회에서 일등을 놓친 적이 없고 전국 대회에서도 눈에 띄는 결과를 내 온 이나였다. 절도 있는 품새 동작과 재빠르게 치고 빠질 줄 아는 겨루기 실력은 어디에서나 단연 돋보였다. 올해와 내년만 성적을 잘 받으면 선수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데 갑자기 다른 데로 눈을 돌리니 관장님이 목덜미를 잡을 만했다.

“흐음, 그럴 수 있지. 몸이 기억하는 건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문제는 이미 네가 알고 있는 것 같고. 방법은?”

고모가 이나의 머리를 톡톡 가볍게 두드려 주며 물었다. 다시 돌아온 질문에 이나가 주먹을 꽉 그러쥐고 태권도 기본 준비 자세를 취했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정면을 바라보며 “연! 습!” 하고 외쳤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고모가 까르락거리며 웃었다. 

“그렇지! 연습 하면 우리 이나지. 날아차기 잘 안 된다고 몇 밤을 새우던 우리 꼬꼬만데.”

고모가 예전 생각이 났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올렸다. 도장에선 매서울 정도로 엄했지만, 집에서는 이나의 어리광을 웬만하면 다 받아 주는 고모였다. 고모의 응원에 다시 마음을 다잡은 이나는 씩씩하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비가 오려고 그러는지 평소보다 공기가 습했다. 낮게 낀 구름 때문에 더위가 한풀 꺾인 듯 했다. 이나는 새로 정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동장으로 향했다. 방학이라 좋은 점은 시간이 많다는 거였다. 태권도장 말고 다른 학원은 다니지 않으니 남는 시간들을 연습에 쓸 수 있었다. 다만 따로 연습할 데가 마땅히 없어 주로 학교 조회대 위에서 혼자 동작을 복습했다. 조회대는 대체로 비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누가 먼저 와 있었다. 세찬이였다. 이나는 콧노래를 멈추고 굳은 얼굴로 조회대 계단으로 올라섰다. 태극 4장 금강 품새를 연습하고 있던 세찬이도 이나를 발견하곤 얼굴을 구겼다. 

“뭐냐? 에어컨 빵빵한 도장 놔두고 왜 여기서 연습을 해?”

이나가 먼저 물었다. 세찬이는 연습을 멈췄다. 그러곤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곧바로 가방을 챙겼다. 그런데 가방을 챙겨 들던 세찬이가 허리를 굽혔다 피며 짧게 신음을 냈다. 

“뭐야. 어디 다쳤어? 허리 삔 거 아니지?”

놀란 이나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자 세찬이가 얼른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티 나게 거부하는 그 모습에 이나는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참 나. 안 잡아먹거든? 마음 급한 건 알겠다만 무리해서 하지 마. 시합 때까지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나가 자기도 모르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세찬이의 움직임을 살폈다. 허리를 완전히 펴지 못하고 약간 수그리고 있는 걸 봐서는 통증이 꽤 있는 듯했다. 허리가 단단히 중심을 잡아 줘야 모든 동작들이 제대로 될 텐데. 이나도 잦은 부상으로 고생을 해 봤기 때문에 세찬이의 상태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세찬이에게 감정이 좋진 않았지만 걱정은 됐다. 재수 없게 구는 것과 별개로 세찬이의 연습량은 이나도 인정할 정도였다. 이나는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연습을 했지만, 세찬이는 관장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연습을 했다.

문제는 관장님에겐‘만족’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장님은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그쳤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세찬이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매서운 관장님의 감시 아래에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연습을 하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당연했다. 과한 연습은 부상으로 이어지기 쉬웠다. 어기적거리는 품을 보니 왜 도장을 놔두고 여기서 이러고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관장님한테 들키기 싫은 마음은 알겠는데, 너 그러고 계속 연습하면 허리 아작 나. 병원 가서 물리치료 받고 약도 먹어. 일단 나아야 뭘 하지.”

“뭔 상관이야? 내가 알아서 해. 아버지한테 말하기만 해라. 가만 안 둔다.”

세찬이가 눈을 부라리며 협박조로 말했다. 가만 안 둔다는 세찬이의 말은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힘겹게 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가는 세찬이의 뒷모습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이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 냉찜질이라도 꼭 해! 그냥 두지 말고. 어?”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는 세찬이의 등 뒤에다 대고 이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다고 말을 들어 먹을 것 같진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더 속이 탈 것 같았다. 

“어휴, 저 고집불통. 염증 번지면 큰일인데.”

이나는 혀를 차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춤 동작들을 머릿속으로 되감아 보면서 비척거리던 세찬이의 뒷모습을 억지로 지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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