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빛 Mar 01. 2023

6. 꼴랑 2, 3분

6. 꼴랑 2, 3


핸드폰으로 새로 정한 노래를 틀고 소리를 최대로 높였다. 잘 안 맞춰지는 동작 위주로 다시 연습을 해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서하였다. 

“어디야? 나 오늘 아빠 데이인데 아빠 일 있어서 늦는대. 어차피 학원 쉬니까 연습 같이하자.”

서하는 지금 출발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서하는 진로를 태권도 쪽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서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녔다. 방학이라 시간이 많아진 이나와 달리 서하는 더 바빴다. 안 그래도 같이 맞춰 볼 시간이 적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시간이 났다니 반가웠다. 

서하는 부모님이 이혼한 뒤로 한 달에 한 번은 학원을 통째로 쉬고 자기 아빠랑 놀았다. 가까운 도시에서 사진작가 일을 하고 있는 서하네 아빠는 주말에 일이 많아 평일에 쉬었다. 아빠 쉬는 날에 맞춰 둘이 만나는 거였는데, 학원 때문에 만나는 시간이 짧아지자 그냥 그날은 쉬어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되지도 않아 서하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버지 많이 바쁘시데? 서운하겠네.”

“엄마랑 이혼하기 전보다 더 자주 만나는데 뭘. 그땐 한 석 달에 한 번 봤는데.”

서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야, 근데 우리 연습 시간이 좀 부족한 것 같지 않냐? 시합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각자 연습하는 건 한계가 있는 것 같고.”

“그치.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우리끼리 합숙 한번 하는 거 어때?”

“오! 합숙 좋다. 근데 진아 언니는 귀찮아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긴 해. 언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니까. 괜히 같이하자고 했나?”

이나랑 서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연습 세 번이라는 조건까지 걸어가며 먹을 걸로 꾀어 놓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깬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연습에 불러내기도 미안했다. 인원이 적으면 적은 대로 다섯 명끼리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모르겠다. 일단 진아 언니한테 직접 한번 물어보자. 언니도 생각이 있으니까 별말 없이 나와 주는 거겠지.”

서하가 앞차기 옆차기 뒤차기로 연달아 몸을 풀면서 말했다. 

“그러려나? 아, 다른 애들은 같이한다고 할까?”

“시후는 바로 한다 그럴 것 같은데 지후는 잘 모르겠다. 걔넨 봐도 봐도 모르겠어.”

“얼굴만 비슷하지 성격은 완전 다르잖아. 그냥 볼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딴 판이야.”

이나랑 서하는 후후 쌍둥이를 떠올리다 “풋.” 하고 웃고 말았다. 둘이 동시에 태권체조에 빠져든 걸 보고 취향이 비슷한가 보다 했는데 웬걸. 시후랑 지후는 보면 볼수록 공통점이 없었다. 노래를 새로 고를 때도 제일 많이 부딪힌 게 그 둘이었다. 요란한 댄스 음악만 듣는 지후랑 달리 시후는 잔잔하고 세련된 피아노 음악만 좋아했다. 가위바위보를 다섯 번은 하고 나서야 의견을 억지로 일치시킬 수 있었다. 

“난 름이도 걸려. 름이네 아빠도 만만치 않으시니까.”

아빠 얘기만 나오면 더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던 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서하가 말을 받았다. 름이 아빠는 애들 교육에 열을 내는 편이라 학교며 학원이며 다 쫓아다녔다. 그래서 이나도 서하도 름이 아빠를 본 적이 있었다. 름이처럼 체구가 작고 말랐지만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고 커서 기억에 남았다. 집안일도 다 도맡아 하며 애들 먹는 것 입는 것 하나 허투루 한 게 없다고, 제발 특히 더 신경 써 달라고 관장님한테 신신당부를 하던 게 생각났다. 

“걔네 아빤 오히려 좋아하시지 않을까? 남자애가 만날 그림 끼적이고 있다고 뭐라 한다잖아. 진짜 이해할 수가 없어. 내 아들이 그런 재능 있다면 나는 신나서 업고 다녔을 텐데.”

이나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습장, 스케치북, 수첩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려 대던 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하는 애를 왜 말리는 건지. 떨떠름해 하는 이나를 흘낏 살펴보던 서하가 슬쩍 말을 이었다. 

“근데, 남자애 어쩌고 하는 건 핑계고, 사실 름이네 아빠 옛날 꿈이 화가였대. 그림 그리는 걸로 먹고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반대한다고 하더라고.”

“아아. 그래? 근데…… 뭐야. 뭐지, 박서하? 그런 사실은 언제 또 안 거지? 언제 름이랑 그렇게 친해진 거지?”

이나가 놀리듯 말꼬리를 늘이며 계속 묻자 서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거 아니야. 뭐 약간의 호감이 있긴 하지만.”

서하는 담백하게 받아치곤 학다리서기 자세를 취했다. 학이 한쪽 다리를 들고 서 있는 모양처럼 보이는 학다리서기 자세는 서하가 유독 어려워하는 자세였다. 한 발로 선 다음, 다른 한 발은 무릎을 굽혀 들어 올려 서 있는 다리의 무릎 안쪽으로 가져다 대야 하는데 자꾸 중심이 흐트러졌다. 이나는 서하의 어깨를 뒤에서 단단히 잡아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으아, 이건 진짜 못 하겠다니까.”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자세를 무너트리고만 서하가 종아리 부근을 주먹으로 쳤다. 근력이 받쳐 주지 않은 상태에서 한 발 서기를 하면 종아리가 땅길 수밖에 없었다. 

“흐음. 아무래도 다들 기초 체력부터 쌓아야 할 것 같은데…….”

이나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나야 허구한 날 운동에만 매달려 지내 왔으니 체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애들은 아니었다. 다들 태권체조를 하고 싶어 하긴 했지만, 몸이 그만큼 따라 주질 않았다.

“하긴. 우린 도장에서 말고는 따로 운동은 안 하니까. 이게 합숙만으로 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특히 우린 단합이 전혀 안 되잖아.”

서하도 덩달아 심각해져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나는 일단 노래를 정지시켰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는데 서하가 공감해 주니 내심 반가웠다. 다들 틈이 날 때마다 연습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여섯 명이 하나처럼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연습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동안은 혼자 알아서 대회 준비를 하면 됐는데, 지금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고작 동작 몇 개를 더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나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어. 태권체조는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잖아. 서로 호흡을 맞춰 보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될 테니까.”

이나의 말에 서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게 아니라 다들 모아 놓고 다시 얘기 좀 해 보자.”

실행력이 빠른 서하는 당장에 핸드폰을 꺼내 다른 애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행히 점심시간쯤이라 다들 연락이 됐다. 

―나, 만나 분식집에 있음. 여기로 와. 용돈 받았으니까 특별히 쏜다.

진아 언니의 답장에 이나랑 서하는 잽싸게 가방을 챙겼다. 만나 분식집이라면 교문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학원들이 학교 근처에 모여 있어서 름이도 시후 지후도 바로 올 수 있다고 했다. 

이나랑 서하는 단숨에 분식집까지 달려갔다. 배도 고프고 마음도 급했다.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맨 안쪽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진아 언니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우와. 언니 이걸 다 시켰어?”

식탁엔 진아 언니가 미리 주문해 놓은 음식들이 벌써 나와 있었다. 떡볶이, 순대, 튀김, 우동, 김밥, 음료수까지 골고루 다 있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돈 많이 썼다고 혼나면 어쩌려고.”

이나는 매콤 달콤한 떡볶이 냄새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돈 괜찮아. 여태 얻어먹은 것도 있는데, 뭘.”

진아 언니가 씩 웃으며 숟가락, 젓가락을 건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름이와 후후 쌍둥이도 분식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싸. 배고팠는데 대박.”

지후는 인사도 건너뛰고 덥석 오징어튀김부터 집어 들었다. 그러자 시후가 지후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네가 원숭이냐? 인사 먼저 하고 물티슈로 손 닦고! 젓가락으로 똑바로 집어 먹어.”

“우씨. 그래, 나 원숭이다. 보태 준 거 있냐? 하여간 깔끔 떨기는.”

“깔끔을 떠는 게 아니라 그냥 기본적인 걸 지키라는 거거든?”

자리에 앉자마자 투덕거리는 둘을 보며 이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이서 만날 그렇게 싸우면 안 지겹냐? 일단 먹자. 먹으면서 얘기해.”

진아 언니는 그렇게 말하며 앞접시에 음식들을 덜어 주었다. 다들 “잘 먹겠습니다!” 하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여섯 명이 모여 앉으니 조용하던 분식집 안이 순식간에 떠들썩했다. 도장에선 눈인사나 조금 하고 바로 눈치 보며 연습하느라 서로 얘기도 잘 나누지 못했는데, 바깥에서 만나니 할 말이 막 생겼다. 재잘거리고 웃고 떠들면서 먹으니 떡볶이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이나랑 서하가 말한 거 생각들 해 봤어?”

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진아 언니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문자로 얘기했던 부분을 같이 상의해 볼 차례였다. 

“음,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이왕 하기로 한 거 더 제대로 하면 좋겠거든, 나는.”

시후가 먼저 의견을 밝혔다. 따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지 신중한 말투였다. 반면 지후는 옆에 있는 휴지를 잘게 찢으며 딴청만 피웠다.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후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던 름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나도 그래. 사실 혼자 한다고 해 보는데 쉽지가 않더라고. 괜히 들어와서 폐만 끼치는 것 같고.”

“뭔 소리야. 름이 네가 동선 안 잡아 줬으면 우리 아직도 헤매고 있을 거야. 너는 기초 체력만 좀 받쳐 주면 다른 건 금방 따라올 거야. 걱정도 하지 마.”

힘없는 름이의 말에 서하가 얼른 끼어들어 다독여 줬다. 

“뭐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하면 좋긴 좋지. 근데 학원 다니는 애들도 있잖아. 시간을 어떻게 맞출 건데?”

진아 언니가 남은 떡볶이 떡을 세 개씩 젓가락에 끼워 먹으며 물었다. 

“아침엔 다들 시간 되지 않아?”

이나가 우동 국물을 홀짝이며 모두를 둘러봤다.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황금 같은 방학에. 당연히 늦잠 자야지!”

자기가 찢은 휴지들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며 지후가 대뜸 큰 소리로 대꾸했다. 

“잠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대회까지 한 달밖에 안 남았어. 우리 아직 안무도 덜 짠 상태라고.”

이번엔 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야, 무슨 한 시간짜리도 아니고 꼴랑 2, 3분 정도인데. 뭘 그렇게 빡세게 하냐?”

지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젓가락으로 식탁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훈훈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와, 지후 쟤 순간 세찬이인 줄. 말투가 왜 저러냐? 같이 붙어 다니더니 옮았나 봐.”

서하가 식겁하며 이나에게 속닥거렸다. 정이 뚝 떨어진다는 표정이었다. 이나는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지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억지로 모이자는 얘기는 아니야. 정 못 하겠다면 어쩌겠어. 의견이 다 같을 순 없지. 그런데 있지, 네가 ‘꼴랑’이라고 한 그 2, 3분을 위해서 다들 몇 달은 연습했을 거야.”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자자. 진정들하고. 그럼 시후는 나올 수 있는 거고 지후는 못 나온다는 거지?”

진아 언니가 중간에서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미 상한 기분을 돌이킬 순 없었다. 

“뭐 선택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네. 이렇게 귀찮아질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안 했지. 난 그냥 갈래.”

지후는 가방을 챙겨 일어나 버렸다. 


이전 05화 5. 연! 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