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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Mar 01. 2023

7. 생각지 못했던 이유

7. 생각지 못했던 이유


잘 먹었다는 인사도 없이 나가 버린 지후 때문에 분위기는 더 냉랭해졌다. 금방까지 맛있게 먹고 마셨는데 그게 다 얹힐 것 같았다. 이나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쫓아가서 데려와야 할지 내버려 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지후가 좀 변덕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 당황스러웠다. 

“쟤 왜 저래? 아침에 연습하러 나오면 몸이 부서지기라도 해?”

황당해 죽겠다는 듯 서하가 따졌다. 

“반응이 좀 과하긴 한 것 같은데. 시후 넌 지후가 왜 저러는지 알아?”

진아 언니가 물었다. 이나랑 름이도 시후를 바라봤다. 시후는 콧잔등을 긁적거리다 “글쎄.” 하고 말았다.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우리끼리 연습하자. 영상으로 연습하는 거 찍어서 보내 주고 따로 좀 더 연습하라고 하지 뭐. 힘들겠지만 시후 네가 옆에서 자세 좀 봐주고 그래.”

진아 언니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이럴 때 진아 언니는 한참 언니 같았다. 이나는 그런 진아 언니가 너무 든든하게 느껴졌지만, 마냥 그 든든함에 기대기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근데…… 언니는? 억지로 나오는 거 아니야? 약속한 세 번도 넘었잖아.”

말이 나온 김에 이나는 내내 걸렸던 걸 터놓고 물어봤다. 진아 언니가 기다렸다는 듯 나가  버릴까 봐 무서웠지만 무섭다고 피하기만 할 순 없었다. 그건 이나가 좋아하는 태권도 정신과도 맞지 않았다. 용기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하면 후회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라던 고모의 말도 떠올랐다.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나 유진아야. 내가 생각도 없이 너네한테 끌려다니겠냐?”

진아 언니가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이나의 짧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담담하고 담백한 진아 언니의 대꾸에 이나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나는 꽤나 마음고생을 해 왔다. 무작정 팀을 꾸리긴 했지만 잘하고 있는 건지 매일 스스로를 의심하느라 지쳐 가고 있었다. 지후가 일어나 나가 버린 후로 명치끝이 아릿아릿, 목 안이 따끔따끔한 걸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진아 언니의 덤덤한 대답에 온갖 감정이 북받쳤다. 

“뭐야. 우리 이나 우는데? 언니 지금 이나 울린 거야?”

서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어 놀렸다. 그러자 시후랑 름이가 웃음을 참으려 입을 틀어막고 큭큭거렸다. 싸늘했던 분위기가 그제야 좀 풀어졌다. 

“우리 양 여사님이 나한테 가르친 게 딱 세 가지거든? 밥 굶지 마라. 남한테 함부로 굴지 마라. 마지막으로! 인생 짧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진아 언니가 손가락 세 개를 꼽아 가며 말했다. 뜻밖의 명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름이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양 여사님은 진아 언니네 할머니였다. 정육점을 하는 진아 언니네 할머니는 특유의 호쾌한 성격으로 읍내에서도 유명했다. 시장 사람들을 모아 시장 이야기를 담은 책도 내고, 노래자랑에 나가 우수상도 타고, 읍내 봉사활동에도 항상 앞장섰다. 할머니랑 둘이 사는 진아 언니는 못 말리는 오지랖 여사 때문에 자기만 고생이라며 고개를 내젓곤 했다. 하지만 진아 언니의 애정 어린 눈빛을 보면 언니가 할머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그건 그렇고 내가 아주 좋은 소식을 하나 갖고 왔는데. 하필 지후 녀석이 판을 깼네. 어쨌든. 우리 구경 가자!”

“구경?”

“어. 인맥 하면 또 우리 양 여사님 아니니. 오합지졸끼리 백날 끙끙거려 봤자 오십보백보라고 전문가들 하는 것 좀 보고 배우래.”

“전문가들?”

“짜잔. 작년 태권체조 우승팀 주장 연락처지롱.”

진아 언니가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 이마를 맞댔다. 

“와, 이거 진짜야? 메달 좀 봐. 대박.”

이나가 잔뜩 흥분해 연신 대박을 외쳤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메달을 따 왔지만, 진아 언니가 보여 준 우승팀 사진 속 메달은 왠지 더 특별해 보였다. 팀으로 움직인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 막 어렴풋이 알아 가는 이나에게 그 메달은 더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마침 이 팀이 지방에 합숙 훈련 내려왔다 하더라고. 다다음 주쯤? 올라가기 전에 한번 보재. 우리도 어차피 합숙 얘기 나오고 했으니까, 1박 2일 일정 잡아서 한번 만나러 갔다 오자.”

“오예! 이거 엄청 자극 되겠는데? 으아, 우리 연습한 것도 보여 줘야겠지?”

서하가 떨린다는 듯 얼굴을 부여잡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는 시후도 서하의 말에 약간 얼은 듯했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들에 름이는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였다. 

“아이고, 진정들 좀 해. 일단 지후부터 설득해야지. 이나 너는 뭐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다, 이런 마음인 것 같은데. 팀 활동하는데 완벽하게 의견 맞추기가 쉽냐? 싫은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고 그런 거지. 그렇다고 일일이 다 맞춰 줄 순 없는 거야. 선택해야 할 땐 확실히 해야지. 정 안 되겠다고 하면 지후는 빼고 가는 거고.”

진아 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이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괜찮아 보이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았지, 사실은 무책임하게 지후를 보내 버린 게 아닌가 내내 걸려 하던 참이었다. 

“이따 내가 얘기해 볼게. 걔 집에서 날마다 연습해. 나보다 더 연습벌레야.”

시후가 은근슬쩍 지후 편을 들며 나섰다. 

“아니, 근데 아깐 왜 그러고 간 거야?”

서하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다른 애들도 납득이 가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까 지후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했다. 시후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아침엔 원래 세찬이 연습하는 거 도와주거든. 겨루기 상대도 해 주고, 발차기 미트도 잡아 주고. 우리끼리 아침 연습하면 그건 또 못 도와줄 테니까.”

“아…….”

생각지 못했던 이유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후후 쌍둥이가 세찬이랑 붙어 다니던 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지후가 따로 아침 운동까지 같이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갑작스럽게 일정이 뒤틀리게 생겼으니 지후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만했다. 게다가 이나랑 세찬이가 틈만 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판에, 가운데서 얼마나 난감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지 못하고 괜히 성질만 부리다 가 버린 것이었다. 

“세찬이가 지금은 엇나가고 삐딱하게 굴고 그러는데, 예전엔 안 그랬거든. 길 가다가 죽은 개구리만 봐도 울면서 묻어 주고 그랬어, 걔가.”

예전 생각이 났는지 시후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에엑? 멀쩡하게 살아 있는 개구리도 밟아 죽일 것처럼 구는 애가?”

서하가 안 믿긴다는 듯 되물었다. 너무 현실적인 반응에 이나가 그러지 말라며 서하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세찬이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던 름이는 이미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힐끗 름이 눈치를 살핀 시후가 미간 사이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여하튼. 지후는 세찬이한테 좀 약해. 너넨 이해 못 하겠지만. 아, 뭐 당연히 이해할 필요도 없고. 름이 수첩 뺏고 그랬던 거 우리도 아니까.”

“흠. 너희 셋이 뭉쳐 다닌 거야 우리도 알지. 근데 그렇다고 어영부영 끌려다닐 순 없어. 지후도 결정을 내려야지.”

진아 언니는 이번에도 딱 부러지게 말했다. 이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보탰다.

“이유는 대충 알았으니까 시후한테 한번 맡겨 보자. 지후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고.”

“맞아. 어쨌든 오래된 친구잖아.”

 서하가 마지막 하나 남은 김밥을 떡볶이 국물에 쿡 찍어 름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자 굳어 있던 름이의 표정이 풀어지며 대신 두 뺨이 붉어졌다. 헛기침을 하다 쭈뼛쭈뼛 김밥을 받아먹는 름이를 보며 시후와 진아 언니가 서로 ‘요것들 봐라?’ 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자, 자. 그러면 내일부터 우리는 아침 8시에 학교 운동장에서 모이는 거야. 예열 느낌으로 운동장 세 바퀴 돌고, 연결 동작들 서로 맞춰 보자. 한 동작이라도 삐끗하면 다 어그러지니까 합을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해. 름이가 스케치하면서 표시해 둔 동작들은 한 번 더 신경 쓰고. 알겠지?”

이나가 박수를 두 번 치며 주위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전반적인 연습 일정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모두 알람을 같은 시간에 맞추고 주위를 정리한 뒤 일어났다. 벌써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 있었다. 진아 언니와 시후, 름이는 바로 학원으로 가 봐야 했다. 이나랑 서하는 다시 운동장으로 가 연습을 더 해 보기로 했다. 분식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아이들은 내일부터 있을 연습을 위해 기합을 넣었다. 모두 손을 뻗어 한데 포갠 뒤 “아자, 아자, 파이팅!”을 외쳤다. 있는 힘껏 기를 넣었지만, 여섯 명이 기합을 외칠 때보단 어쩐지 헛헛했다. 지후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이 어느 때보다 생각나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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