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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니 Jan 03. 2021

# 11. "(품 안에 사진을 꺼내며)내 딸이야."

재난 영화에서 꼭 죽는 사람이 내가 아니길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이스터 에그 찾기, 반전의 복선 찾기 등이 있다. 영화의 내용에만 집중해 보는 첫 번째 관람과 다르게 반복해서 보면 숨겨진 감독의 팬서비스가 보이고, 영화 후반부 반전에 대한 많은 복선들을 찾을 수 있다. 특별히 복선을 따라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알고 있었던 반전과 결말이 더 깊이 다가올 때가 있다. 복선이 반전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복선 자체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들이 그렇다.


이전에 내가 다니던 회사는 스타트업으로 나와 내 동기가 첫 신입사원이었다. 입찰 경쟁으로 성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내 브랜드를 만들어 브랜드 제작과 관련한 업무가 많아지기 시작할 때 나는 입사를 했다. 바쁜 업무 일정으로 주말 근무가 불가피했다. 주말 근무는 평일 휴무로 대체되었다.


입사한 지 한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동기는 대체 휴무를 사용해 평일이지만 출근하지 않았고, 우리 팀은 사내 브랜드 론칭을 위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사내 브랜드 론칭은 동시에 2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론칭 시기가 가까운 것은 내 동기가 진행을 하고 있는 브랜드였다. 구체적인 회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러 위험 요소를 점검하고, 대처 방안에 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오전 근무시간을 활용하여 팀 회의를 하던 중 임원이 회의장으로 들어와 출근하지 않은 내 동기를 찾았다. 팀장이 대체 휴무 중인 것을 알리자 임원은 전화하여 회사로 출근할 것을 요구했다. 난색을 표하며 팀장은 회의 도중 나가 임원에게 자세한 내용(당시 근무 스케줄이 바빠 3주 이상 주말 근무를 연속해하는 중이었음)을 설명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돌아와 내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동기는 준비되는 데로 회사로 출근을 했고, 팀장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나를 불러 자세한 상황에 대해 물었다. 동기에 의해 따로 불려 나왔지만 사실 난 왜 임원이 굳이 이 동기를 불렀는지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었고, 출근 이후로 느꼈던 사내 분위기와 회의 내용에 대한 설명밖에 할 수 없었다. 동기는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알았다고 했다(이전에도 여러 번 팀원들에게 개별 면담을 요구한 적이 있음).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임원은 우리 팀원을 한 명씩 불러 개별 면담을 하는 중이었으며 곧 나의 차례가 되었다.


대체 휴무 중인 직원을 부르고, 회의를 중간에 끊어가면서까지 진행했던 개별 면담이었기에 잔뜩 긴장을 하고 임원 방에 들어갔다. 앞서 있었던 팀장과 매니저의 개별 면담에서 화가 누그러진 건지 내가 긴장한 정도와 달리 임원은 온화한 분위기를 내며 나를 맞았다. 회사에서 진행되는 업무와 브랜드 론칭과 관련한 내용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복기하며 입장한 나에게 회사생활은 어떤지, 어려움은 없는지를 물었다. 김 빠져 풀어진 내게 팀장과 매니저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같이 일하기에 어떤 사람인지, 본인은 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내겐 그들과 다른 기대를 품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대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임원이 내게 기대를 품고 있다.'는 명제만 남기고 개별 면담을 마쳤다.


인생에 한 부분 혹은 큰 부분을 돌려보고 다시 살아볼 기회는 없지만 어떤 계기로 인생을 돌아보고 그곳에서 다시 배워 '나'와 성격, 가치관을 정돈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퇴사를 계기로 회사생활과 그 안에 나를 돌아보며 지금이라는 결과의 복선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실 그때도 그리고 아직도 저 개별 면담의 목적과 이유, 숨은 임원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 면담에서 임원은 내게 자신이 굉장히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아쉬운 이야기를 하며 내게는 다른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기대는 당시 내가 회사를 사랑하는 이유였고, 몇 달 뒤 그 임원의 큰 미움을 받으면서도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내 작은 실수가 임원에겐 큰 신호로 받아들여졌고, 실수에 대한 피드백보다 책망하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당시 나는 나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더 크게 실망하셨기에 화 내실만 하며,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결국 모든 일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회사생활에서 자신감을 갉아먹게 했고, 더 큰 실수를 야기했다.


직장인에게 주말은 어떤 의미인가? 심지어 주말이 없는 직장인에게 대체휴무는 어떤 의미인가? 정의는 각자 하기 나름이지만 내겐 대단한 의미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그럴 수 있지만 회사에서!) 꿀 같은 휴일에 아무 부채감 없이 불러내는 상사는 일 년 후 COVID-19로 회사 상황이 어려워지자 사원에게 미안한 기색 없이 미안하다고 하며 월급을 분할 지급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여러 복선들을 생각하고 정리하며 지금도 계속 상영되는 내 인생에 적용해보고 있다. 내가 어떤 수상하고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면 지금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을 마주하기로 결정했을 때 나중에 후회보다 만족이 더 클지, 만족보다 후회가 더 클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무언가 결말에 중요한 복선일 확률이 높다. 당시엔 그 복선에 휘둘리는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은 복선인 것을 감지하고 사건과 나를 떨어뜨리고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전과 같이 사건의 결과를 내 몫이라 생각하며 모두를 사랑하려 하기보다 주인공으로서 내 선택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소한 지구에 엄청난 재난이 와서 피난을 가는 길에 불필요한 행동으로 중요한 물건을 떨어뜨려서 가족이 헤어지고 피난이 늦어져 뒤따라오는 비행기 5대쯤은 폭발시켜 내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고구마 오천 개는 주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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