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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시니 Dec 06. 2020

# 2. 금붕어가 된 돌

나는 당신이 자유롭게 누리는 권리가 아닙니다.

회사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다. 년 중 가장 큰 행사로 회사 자체 프로젝트 진행 중 외부 연설자를 섭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섭외 대상은 여러 차례 실수를 통해 업무상의 문제를 보인 곳과 협업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섭외 담당이었던 나는 여러 차례 방문하며 섭외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상대를 더욱 불편하게 했고, 결국 섭외에 실패했다는 내용과 차안을 보고했다. 내용을 검토한 ‘그 상사’는 원래 기획 내용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하며 애교로 일을 성사시켜 오라고 했다.


사람마다 일하면서 무기를 갖추게 된다. 화려한 언변, 합리적인 논리, 뛰어난 설득력, 상사들을 보며 그들의 무기가 부러웠다. 나만의 무기 장착을 위해 어떤 무기를 고를지 고민하고 고른 무기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무기 목록에 한 번도 나의 젊음이나 성별은 포함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회사에서는 ‘젊은 여성이 부리는 애교’는 강력한 무기 취급을 받았다. 유통기한이 있는 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회사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사원이 되는 것이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 회사는 커다란 어항이었다. 나는 어항 안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로 어항 안이 강이고, 바다이고,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돌 같은 사람이었다. 나의 무게로 침잠하여 묵묵히 내 몫을 해내고 싶은 돌. 어항 안에서 돌이 되고 싶던 내게 회사는 금붕어의 역할을 요구했다.


나는 입사 초반에도 ‘모른다.’ ‘처음이라 어렵다’는 핑계를 댄 적이 없다. 부족하더라도 무엇도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비즈니스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능력과 역할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무기인 여성의 애교(물론 내 생각이 아니라 회사 생각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게으른 사원이 된 것이 처음엔 너무 슬펐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상사가 야속했다. 야속한 마음은 분노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항 안에서 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나에게 업무상 파트너에게 애교를 하라고 요구할 수 있지?’라는 질문에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을 대입해 답변을 추측해 보았다. 이전 회사는 스타트업으로 14명 정도의 임직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만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사원과 임원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업무를 하는 구조였다. 감사하게도 신입사원이 임원진의 아이디어를 듣고 물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았었다. 미팅, 식사 등의 형태로 상사를 마주할 때 상사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했던 행동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내 커피를 만들며 한 잔 더 만들어 드리는 것, 필기구가 필요한 자리라면 미리 준비해 두어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도 일단은 상대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 상사가 아닌 후배였어도 난 같은 태도를 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회사 규모상 후배가 없었을 뿐이다. 나의 배려와 호의를 받은 상사는 자신의 위치에 취했던 것 같다. 취한 기분에 내가 본인의 존재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아요.’라는 유명한 영화 대사가 있다. 단지 나는 상대가 필요한 것이 잘 보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나의 호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상사와 일했을 뿐이다. 하지만 상사도 회사라는 어항에 사는 물고기 중 하나였을 뿐이다. 같은 어항 안에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물고기. 옳다/그르다를 판단할 자격이 없는 나와 같은 물고기.


이런 생각 끝에 나의 태도를 돌아보았다. 매일 밤 돌아보아도 나로 비롯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난 이 태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호의적인 태도. 누군가 내가 결정한 나의 태도를 본인의 권리라고 오해하는 것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만 상사 물고기를 타산지석 삼아 나는 누군가의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내가 이상향으로 그리는 ‘어른’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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