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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Aug 29. 2021

그립다, 미체험의 시간들

 구구절절이 변명하지 않겠다. '올드'하다. 내 문화적 취향은 대개 최신의 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특히나 음악에서 그러한데,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쯤 가장 즐겨 듣던 노래는 1990년대의 갱스터 힙합이었다. 아니면 건즈 앤 로지스나 레드 제플린이었고, 그것도 아니면 밥 딜런이나 밥 말리, 프린스였다. 중학생과 밥 말리라니! 음악을 들어도 가사의 의미를 몰랐고, 해석을 알더라도 진의는 몰랐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들었다. 왠지 모르게 매력이 있다고 느껴졌고, 중2병에서 비롯된 약간의 선민의식도 있었다. 어떤 경위로 사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방에는 커다란 사시미를 들고 있는 2 pac의 포스터도 있었다. 도대체 어떤 학생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


눈 몇 번 깜빡이는 새에 어느덧 2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옛날 것들이 좋다. 이제는 '더' 지난 것이 된 밥 딜런이나 건즈 앤 로지스가 좋고, 카잔차키스나 밀란 쿤데라가 좋다. 최신의 것을 선호하는 거의 유일한 분야가 영화인데, 그것도 제작 기술(특히 CG)이나 스케일에 있어서 요즘 게 좋다는 것이지, 연출이나 편집의 방식, 이야기의 무대는 역시 클래식한 것이 좋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쉬 맨」, 알폰소 쿠아론의「로마」, 쿠엔틴 타란티노의「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뭐랄까,  '아! 그 시절!'  따위의 감상을 간절하게 갈구한달까.


개인적 취향은 어디까지나 자유겠으나, 명료하게 지적받을만한 지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우선  '아! 그 시절!'을 부르짖기에는 난 너무 어리다. 일단 2 pac은 내가 생후 2개월일 때 죽었다.「아이리쉬 맨」을 보기 전까지는 지미 호파가 누군지도 몰랐다. 1970년대 멕시코에서 정치적 격랑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주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에 구태여 애정과 향수를 느끼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런 맥락 없는 회귀 경향은 단지 내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디 앨런의 명작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라. 간략히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낭만을 사랑하는 작가 '길(오웬 윌슨)'은 밤거리를 배회하다 느닷없이 나타난 클래식 카를 얻어 타고 시간여행을 떠난다. 최소한의 물리학적 고증 따위는 없다. 물론 필요하지도 않지만. 1920년대의 파리에서 길은, 그곳에서 피카소와 헤밍웨이, 거트루트 스타인을 만난다. 그토록 사랑하던 낭만 속에 머물게 된 길, 그곳에서 묘령의 고혹적인 여인을 만나.. 대충 그런 식이다.


중요한 건 작중 길의 태도인데, 「미드나잇 인 파리」의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는 말하자면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뭐지? 싶었다.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던 오웬 윌슨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찰떡같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너무 과하게 공감돼서 저게 내가 쓴 각본이었던가, 내가 우디 앨런과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 싶었을 정도로. 비가 오는 파리는 포기할 수 없다며 잔뜩 젖은 채 거리를 걷는 길. 아, 뭘 좀 아는 인간이다.


나도 오웬 윌슨(길)처럼 시간여행을 하고 싶었다. 나도 비를 잔뜩 맞으며 밤 12시에 종로의 어느 밤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뜬금없이 나타난 시-발 자동차를 타고 떠나고 싶다. 1996년 내가 태어난 해, 미국으로 가고 싶다. 코넬대학교를 찾아가 칼 세이건에게 당신 덕에 우주를 동경하게 됐다고 말하고 싶다. 1890년 프랑스 오베르의 밀밭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고흐에게 당신의 그림은 훗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 그로부터 1년 전의 이탈리아 토리노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니체의 바지를 붙잡고 제발 오늘은 광장으로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2007년의 대한민국 경기도로 와야 한다. 그곳에서 나 자신과 볼 일이 좀 있다. 지금 당장 그 컴퓨터를 끄라고 소리쳐야 한다.


여하튼,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가 나타나 빛의 속도를 넘어 부리나케 뛰어댄다고 해도 시-발 자동차 따위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낭만은 낭만으로 간직할 때만 온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낭만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그것에 따라서 낭만은 결핍이 될 수도,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길은 본인의 낭만을 성숙하게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서 애드리아나(마리아 꽁띠아르)가 벨 에포크 시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무언가를 깨달았을 따름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 '무언가'는, 밥 딜런이자 레드 제플린일 것이고, 지나가버린 미체험의 모든 것들이다. 그래서, 길은 왜 1920년대의 파리를 사랑했는가? 애드리아나는 왜 벨 에포크를 사랑했고, 빠져나오지 못했고, 나는 또 왜 겪어보지도 못한 과거를 그리워할까?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문득, 지극히 무작위적인 삶의 행태에 대해 직관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의도적이고 당위적이며 일관적으로 설계된 영화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극장 밖의 이미지는 너무나 난잡스럽고 우연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길과 애드리아나가, 그리고 내가 흘러간 시간들을 그리워함은, 극장 앞에서 사르트르가 목도했던 온통 혼란뿐인 우연들의 세상, 그 구성되지 못한 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난리통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표현을 어렵게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현재는 흘러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요동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또 미래는 물론 절대 예견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무섭고 불쾌한 것이다. 1초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인가? 모른다. 오늘 새벽 1시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아보니 모피어스의 전화였고, 나보고 니가 사실은 네오라면서 스카이넷이랑 싸우라며 사지로 내몬다면 어쩔 것인가? 모르겠다. 무지는 곧 공포다.


현재는 구성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획들의 군락을 보는 것과 같다. 어지럽고, 아무런 단어도, 문장도 이루지 못한 무의미 사태다. 그러나 흘러버린 과거는 어떤가? 그것은 하나의 온전하게 완결된 이야기를 이룬다. 그래서 고유한 향기가 있다. 지극히 무의미한 우연이었던 그 모든 사건들이 지나고 나면 그토록 필연이다. 마치 하나의 잘 만들어진 영화처럼, 문학작품처럼, 사건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구조적으로 강고해진다. 편안해지는 것이다.


길은 그래서 1920년의 파리를 사랑한다. 피카소와 헤밍웨이, 거트루트 스타인과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예술과 이야기들, 그 모든 사건들은 인과적이고 합목적적인 텍스트를 이룬다. 그래서 1920년대의 파리에는 고유한 향기를 가지고, 그 향기가 곧 낭만이 되는 것이다.


건즈 앤 로지스나 프린스, 레드 제플린의 음악은 그 시절의 향기로써 존재하고, 그래서 락앤롤이나 영어를 잘 모르더라도 그들을 즐길 수 있다.


결국,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취향이 아닌 법칙에 가깝다. 우리는 모두 코스모스의 부산물들이기에.


자,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1920년대의 파리를 살아가던 애드리아나의 문제다. 애드리아나는 그 시절의 파리에서 아무런 향기를 느끼지 못한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건 벨 에포크(19세기 말~20세기 초의 파리)다. 그런 그녀를 길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영화적인 긴장감을 위해 조성된 대립구도가 아니다. 그 보다 좀 더 근원적인, 실재하는 현재를 대면한 존재자들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다.


영화는 영화일 뿐. 빛의 속도로 뛰어도 우리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난잡하고 혼란한 우연들의 세상을 우리는 대면해야만 한다. 그 대답은 매일 하루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은 낭만에 젖더라도, 내일 아침은 받아들여야한다.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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