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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05. 2023

프랑스 예술학교에서 욱일기를 마주했고 난 혼자였다.

3.1절에 유일한 외국인이 강당에서 발표하기까지


우리 예술학교는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라 우리 학년에는 24명 정도 였고 나는 유일한 외국인이였다. 

평소처럼, 강당에서 대형 스크린을 띄워놓고 예술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 


지난번 수업에서 못 끝낸 아시아,일본 예술을 시작할 때가 되었고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프랑스에 온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아 잘 들리지 않는 불어를 조금이라도 더 듣기 위해 비교적 앞자리에 앉아 필기를 하며 집중했다. 그러던 중에, 그 거대한 스크린에 욱일기가 등장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욱일기를 5분동안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생각치도 못한 것을 마주하면 온 몸이 굳고 당황하는 것 처럼 나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내 눈을 계속 의심했다. 그리고 순간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당의 그 차가웠던 공기는 나를 더 싸늘하게 만들었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숨 쉬기 어려울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교수님의 목소리는 순간 무음 처리가 되었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없었다. 다들 수업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알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구나. 이 심정을 느끼는 사람은 나 뿐이며 지금 난 여기 혼자 있구나. 

그 뒤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이 사건을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면서. 


아직 내 감정에 대해 정리하지 못한 채 난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님께 다음 시간에는 내가 백남준 말고도 다른 한국 예술에 대해 발표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한국이 이렇게 뛰어나고 대단해 , 봐봐. 가 아니라 단순히 애정하는 반 친구들에게 유일한 외국인으로 그 나라에 대해 한번 정도는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핵심은 욱일기의 진짜 의미 전달이었지만.


지인과 통화를 하고 논문 및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소개할 주제를 골랐다. 그 가운데 과연 프랑스에서 말하는 '동양예술'과 '서양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저 자기들과 다른 스타일을 동양예술이라고 칭하며 그 상자안에 자기들 입맛대로 분류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욱일기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발표를 준비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시 생각하고 제3자에게 전화하여 확인을 했다.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참 가볍고 쉽게 표현 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 교수님은 절대 악의가 없었고 지금도 나와 잘 지낸다. 그러나 '무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제2차 세계대전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고른 사진일 뿐이겠지만 실상은 단순한 깃발과 사진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어 그 고통을 겪지 않은 먼 후손인 20대의 나 조차 욱일기를 보자마자 온몸이 떨리며 숨 쉬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자료를 계속 확인하고 지인들에게 컨펌을 부탁했다. 반 친구들은 너무 기대된다면서 내 대본에 어색한 부분들이 있지는 않은지 수정해주고 도와주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발표날은 3.1일 , 삼일절이었다.  


이 사실을 그 전날 네이버에 들어갔다가 알았다. 그때의 심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는데 내가 이제서야 우리나라를 지켜준 분들께 감사합니다 라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이구나 하며 마음이 뭉클했다. 


사실 준비하는 내내 심적으로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진실을 말하는 것 뿐인데 왜 그렇게 떨리던지. 누군가의 행동을 지적하고 반박할때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아무리 진실이여도 말이다. 


대망의 날이 밝아왔고 아침에 준비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의 나라이지만 교수님과 친구들 모두 응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에 있는 반면 삼일운동을 하던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운동을 펼치셔야 했으니 얼마나 분하고 마음이 아프셨을까. 그 운동을 나가기 직전 그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옷을 입으시고 어떤 마음으로 나갈 준비를 하셨을까. 나는 집 문을 열고 나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 발표 시간에 발표를 하면 되지만, 그분들은 집 문을 열고 나가면 총을 든 군인들이 다니며 우리나라 임에도 자유를 빼앗긴 그 숨막히는 광경이 펼쳐지는 구나. 그분들도 얼마나 떨리고 두려웠을까. 나 한명 정도는 빠져도 되지 않을까 너무 무서운데. 하는 생각이 올라올때 요동치지 않으시고 굳건하게 마음을 지키셨구나.


나는 마치 삼일운동에 참여하는 듯 했고 담대하고 비장한 눈빛으로 집을 나왔다. 

' 우리나라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저 잘하고 올게요. ' 라는 말과 함께. 




이것은 작년 2022년 일이다. 그때 마침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인스타에 'Pray for Ukraine' 이라고 올리던 때였다. 나는 그 태그가 유행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길 바랐다. 그래서 그날 욱일기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일본의 만행에 대해 폭로하고 그 태그를 인용했다. 


"이 행동들은 '공감과 연대'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치의 일을 겪지 않은 나라들도 나치독일의 국기를 사용하지 않고 그 고통에 같이 연대한다. 그러나 욱일기는 많은 나라에서 디자인으로도 쓰이고 있다. 나는 적어도 여기 있는 내 친구들은 함께 연대하고, '무지'에서 오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을 끝맺었다.


어눌한 내 불어가 그래도 잘 전달되었는지 친구들과 교수님이 박수를 쳐주셨고 그날은 내 생에 잊지 못할 3.1절이 되었다. 





- 정말 감사합니다. -








* 사진 :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1945년│등록문화재 제389호│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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