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선장사
나의 인생 이야기 / 김맹임 87
다도에서 천막을 치고 도임이와 같이 살면서 그 해 농사한 것을 다 추수하고 11월 달에 광주로 올라 왔는데 그 때 내 나이가 서른 아홉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 남편이 10년간 다니던 농촌진흥원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한 상황인데, 하루는 옆집 아줌마가 어디로 일을 하러 가는 것 같아서 무작정 따라 나섰다. 따라가 보니 양동 공판장에서 생선을 받아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먼저 생선을 외상으로 받아서 판 다음 물건 값을 다음 날 갚는 식이었다. 그날은 내가 옆집 아줌마와 같이 장사를 나가서 받아간 생선을 다 팔고 다른 사람것도 팔아주었다. 그래서 다음 날 부터 나도 생선을 떼어 다라이에 갈치, 고등어, 멸치를 나눠 담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남들이 멀어서 잘 안가는 동네인 오치동, 상무동과 온천동에 가서 생선을 팔았는데 처음엔 이익을 반만보고 물건을 싸게 팔아 단골을 많이 잡았다. 이때 내가 생선 팔러 가면, 사람들이 피부도 좋고 웃고 다니는 이쁜 아줌마 온다고 했다.
하루는 단골을 많이 잡았으니 갈치를 많이 가지고 버스를 타러 갔는데 그날이 토요일이라 학생들이 버스에 많이 탔다. 내가 갈치 담긴 다라를 갖고 버스에 타니 차장이 냄새난다고 계속 다라를 버스에서 내려버려서 오랫동안 버스를 타지 못했다. 나중에야 학생들이 뜸해져 겨우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서 얼마나 설웁던지 차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눈물을 주체 못하고 통곡을 했다.
어느날은 우리집에서 다라이 가지고 버스타러 막 뛰어가는데, 동네에서 공사를 하던 곳을 지나다가 나도 모르게 내 다리 복숭아뼈에 못이 박혔다. 그런데 빨리 버스를 타야해서 그것도 모르고 오치에 도착했는데, 발이 너무 아파 한 아줌마에게 왜 다리가 아픈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양말을 벗어 보니 복성씨에 작은 못이 박혀 있었다. 못을 빼니까 피가 나와서 아줌마가 옥도쟁끼를 가져다 주고 불을 가져다 줘 쬐게 했는데 그 아줌마가 "어떻게 생 살에 못이 박힌줄도 모르고 계셨냐"고 놀랐다. 그리고 그날 장사를 하느라 하루종일 걸어다녔는데 다리가 애려 혼이 났다.
어느날 한번은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는데 김장철이었는지 아줌마가 김장을 하고 있았는데 김치가 너무 맛있게 보였다. 그런데 아줌마가 김치 간좀 보라고 줘서 먹었는데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서 아줌마에게 아침밥을 못 먹고 나왔는데 밥 한 숟갈 달라고 했다. 그 아줌마가 식은밥 밖에 없다고 미안해 하면서 물을 끓여서 뜨거운 물에 식은 밥을 말아 주어서 김치에 한 그릇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있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제대로 밥도 못먹고 나와서 장사를 하다 배가 고프면 100원짜리 막걸리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은데, 100원이면 아침에 자식들 돈을 줄 수 있단 생각에, 배고프면 물만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 밤 늦게 집에 오니 남편은 자고 있고 아침에 내가 해놓고 간 밥이 하나도 없이 빈 밥통만 있었다. 그땐 전기밥솥도 없어서 밥을 바로 할 수 없어 그냥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 그릇 먹고 잤는데 속이 쓰려 혼났다.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용강촌에 가서 물건 떨이하고 다시 양동까지 리어카를 끌고 가고 그렇게 일을 했는데, 어떻게 남편이 하루종일 일하고 온 마누라 먹을 밥도 해놓지 않고 자고 있을 수 있는지 죽을때까지 못 잊을 것 같다.
명월이 지나면 장사가 안되어 집을 짓는 업자인 뒷집 민재 아빠를 따라가서 2층 슬라브집을 짓는데서 노가다를 했다. 하루종일 모레 자갈 섞은 걸 2층 지붕으로 올리고 왔더니 아침에 온 몸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도 다시 나가 집 세 채를 지었다. 그런데 엄마가 우리집에 오셔서 하루를 쉬고 대체 할 사람을 못 구해 다음날 새벽에 밥을 해놓고 일을 나갔는데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새벽에 노가다 갔는데 사위와 엄마는 자고 있는 걸 보고 울면서 집에 오면서 다시는 너희집에 안 온다고 했는데 그 뒤로 정말 못오시고 돌아가셨다.
어느 겨울날 바람이 불고 눈이 팔팔 올 때 명태 한 박스를 머리에 이고 오치를 갔는데, 한 부잦집 아줌마가 생선을 손질해 주면 다 산다고 해서 펌프우물에서 눈을 맞으며 맨손으로 차가운 물로 언 동태를 힘들게 배따고 손질해주니 손이 벌겋게 되었다. 그때 방에서 내 어머니 나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바람불고 눈 오는 날 저렇게 이쁜 각시를 장사시키네. 아줌마는 남편이 없소?"
"남편 없는 사람 있다요? 남편도 있고 아들 딸들도 많은 대 가족이요."
"서방 복이 있어야지 자식 덕도 보지, 자식들 다 필요없어라. 사람이 태어나 한 번이라도 남편 덕 보고 살아야 늙어서 한이 없지 그렇게 살다 늙으면 한이 돼라.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줄테니 시집가시오.
밥도 안해 먹고 편하게 살것이오."
"아니 연세도 드신분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신다요.
우리 자식들은 어찌하라고 버리고 시집을 간다요.
그런 소리 마시요."
그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어느날은 생선을 팔러 어떤 부잣집에 들어갔는데 개 밥 그릇에 흰 쌀밥이 들어 있는 걸 보았다. 우리 새끼들은 납작보리쌀이 들어있는 맛없는 정부미 밥을 먹고 사는데 개도 쌀 밥을 먹는 걸 보고 더이상 정부미를 사먹지 않았다.
나중에는 방림다리에서 장사를 했는데 처음에 장이 설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다라이를 들고 장사하다가 경찰차에 실려가 다시는 안하겠다고 하고 풀려났다. 그런데 다음날에 다시 장사를 나갔는데 또 경찰차가 와서 피하려고 다라를 들고 뛰어서 도로를 건너가다 택시에 받혔는데 그냥 일어나서 길가의 집 안에 숨었다. 그런데 경찰이 병원가게 나오라고 해서 나가서 택시는 잘못이 없으니 보내달라고 한 후 병원도 안갔다. 그 후 며칠 온 몸이 아팠지만 양동까지 다니면서 계속 방림다리에 나갔다. 또 한 번은 물을 받아 길을 건너다 오토바이에 받혀 떨어져서 팔이 다 벗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생선장사를 해서 열두식구 먹이고 여덟명 자녀들 모두 다 학교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