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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관 Jul 21. 2023

이젠 그리운 아빠

My Father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8년이 되는 기일이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올해 80세가 되신다.  나는 문득 아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고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도 아버지라는 말이 어색해서 계속 아빠라고 불렀었다. 아빠는 그 시대 보통 사람들처럼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셨다. 하지만 나는 1남 3녀 중 아빠의 첫딸로 태어나서 다른 여동생들에 비해 귀여움을 더 받았던 것 같다.  우리 자매들은 아빠에게 "너희는 여자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빨리 시집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아마 내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큰 이유인 것 같다.

우리 아빠는 충남 당진의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아빠는 어릴 적에 인천으로 이사와 안 해 본일이 없다고 하셨다.  엿장수부터 시작했고 건축 현장 인부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건축 설계 일을 갖은 고생하시면서  배우셨다고 하셨다.  어릴 적 새벽에 일어나 보면 아빠가 건축 설계용 책상에 앉으셔서 설계에 집중하고 계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아빠 모습이 멋있게 보였다.  아빠는 건축 잡부로 시작해 집을 설계하고 집을 지어서 파는 건축업자가 되셨다. 가끔 건축현장에 엄마랑 함께 가보면 아빠가 인부들에게 지시하며 일하는 모습이 아주 자신감 넘쳐 보였고 그래서 아빠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아빠가 단독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다 지으면 우리 식구들이 청소하고 들어가서 살다가 팔고 또 다른 새집으로 이사 가고를 여러 번 했다.  어릴 땐 새 집에 사는 게 당연한 걸로 알았는데 그것이 평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아빠는 단독 주택에 재미를 붙이신 후에 다음으로 연립 주택을 지으셨고 연립 주택도 잘 되어서 빌라도 여러 동 지으셨다.  아마도 건축 사업을 제대로 계속하셨으면 아파트도 건축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빠가 밖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식구들은 괴로워야 했다.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집에 오셔서 풀어내시는 것 같았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사셨는데 성격이 깔끔하신 아빠는 내 방이나 책상 위에 물건이 늘어져 있으면 크게 꾸짖으셨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아빠가 들어오시지 않는 저녁 시간에는 우리는 엄마와 깔깔대며 행복했었다.  그러다 아빠의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우르르 방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왜냐면 안 자는 우리를 보시면 아빠의 힘들었던 젊은 시절부터 현재 얼마나 힘든지의 속풀이를 우린 무릎 꿇고 몇 시간이고 들어야 했고 술 취한 아빠가 무서워서 울고 있는 일이 많았다.

우리가 자고 있는 한밤중에 들어오셔도 아빠는 우리를 깨워서라도 연설을 하시는 날도 있었다.

아빠는 술을 거의 매일 드시고 오시는 날이 많았는데 그런 날은 대부분 집에 들어오시면서 갖가지 불만을 토로하셨다.


"초인종 눌렀는데 왜 빨리 문 안 열었느냐?"부터 "현관에 신발정리가 왜 안 되어 있느냐?"와 같은 여러 가지 불만을 엄마는 거의 매일 들으셨다. 아무 말 없이 아빠가 들어오시는 날엔 오늘은 무엇으로 화를 내실까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엄마를 때리기도 하셨고 술상을 차려오라고 해서 차려오면 술상을 엎는 날도 있었다.


아빠가 심하게 술주정을 하시는 날에는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집 밖으로 피신을 했다. 그중에 엄마를 제일 먼저 피신시키는 건 우리의 목표였다. 막내 남동생이 국민학교 고학교 때쯤부터 아빠가 편애하는 남동생만 남기고 우리 여자들은 다 피신했다가 남동생이 아빠 잠드셨다고 우리에게 알리면 그때 집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혼자 남았던 남동생은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급하게 나와서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겨울이 제일 괴로웠다. 나중에는 우리도 훈련이 되어서 윗 옷을 밖에 내어 놓았다가 나갈 때 입었고 또 엄마 중고차가 생기면서 그곳이 우리의 따뜻한 피신처가 되었다. 그러다 아빠가 주무시면 엄마는 나가셔서 과자며 치킨이며 우리 먹을 것을 몇 봉지씩 사 오셨다.  엄마는 그런 것들을 사 오시며 스트레스 해소를 하시고 우린 그걸 먹으며 잊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때 나는 우리 엄마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아빠가 미웠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쯤에는 그런 아빠에게 너무 화가 나서 "도대체 매일 왜 그러시냐?"라고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그때 바로 물컵이 나한테 날아와서 깨졌고 내 발에 유리가 박혀 피가 많이 났는데 그 흉터는 지금도 크게 남아있다. 난 바로 집을 뛰쳐나왔고 아빠한테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무서웠다. 나는 그날 발이 아픈 것보다 앞으로 이렇게 매일 살아야 하는 날들이 너무 괴로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식구들은 이런 나날들을 보냈었다.


아빠가 건축 사업이 아주 잘 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아빠는 작은 아버지와 배 사업을 시작하셨다. 처음엔 배 한 척을 사서 사업이  잘 되어 배를 여러 척 사셨는데  얼마 후에 배 사업이 부도가 났고  건축 사업까지 함께 부도가 나서 아빠는 빚쟁이들이게 쫓기는 처지가 되셨다. 나는 그때 결혼을 해서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엄마와 동생들은 집에서 그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우리 식구들은 그래서 각자의 마음에 상처들이 많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서로 들추고 싶지 않은 옛이야기들이 많다.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아빠는 다시 건축 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사업을 성공도 못 시키시고 건축현장에서 주무시다가 심장 마비로 돌아가셨다.


예전엔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빠가 많이 미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는 된다.  제대로 된 교육을 지 못하신 아빠가 엿장수부터 시작해 건축회사 사장까지 되신 것은 참 대단하셨다는 것을 내가 나이가 들어보니 알 것 같다. 건축업을 다는 건 아주 거친 사람들을 다루는 일인데 깡 마른 아빠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어렸을 때 아빠의 연설 중에 많이 하셨던 말은 "아빠가 얼마나 힘든 줄 아냐?"이었는데 그때는 그 말 듣기가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깡마른 아빠의 두 어깨에 우리 집 여섯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었으니 아빠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해가 간다. 지금 살아계시면 이젠 내가 용돈도 드릴 수 있고 맛있는 밥상도 준비해서 아빠가 좋아하시는 매콤한 요리를 해 드릴 수도 있을 텐데 아빠는 이 세상에 다.


아빠의 깔끔한 성격으로 항상 엄한 교육을 받은 덕분에 지금 우리 사 남매는 각자 사는 집을 단정하고 깔끔하게 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아빠의 술과 담배로 너무 지친 우리 자매들은 그렇지 않은 남편들을 만났다. 여자들은 어렸을 때 자라면서 우리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와 우리 아빠와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가 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자매들은 아빠와 다른 가정적이고 술과 담배 안 하는 사람을 만나 잘 살고 있다. 우리 아빠도 그러셨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무능한 엄마와 우리 사 남매를 키우기 위해 버거웠을 아빠의 삶의 무게를...


아빠의 18년 기일인 오늘 아빠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렸을 땐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하셨던 아빠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아빠가 옆에 계셨으면 좋겠단 생각에 아빠가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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