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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관 Mar 13. 2023

1.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인생 이야기 / 김맹임 87

1. 나의 어린 시절


난 음력으로 1937년 3월 28일에 전라남도 남평읍 우산리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집이 네 채있는 월평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아버지 이름은 김형보 였고 어머니 이름은 이 이쁜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히 생각해 아침마다 부엌에 뗄감나무를 한 짐 들여놓아주시고 아궁이의 재를 깨끗히 치워주신 후, 따뜻한 물을 한 솥 끓여주셨다. 이렇게 어머니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고 아끼셨다. 나는 아부지가 어무니한테 한 번도 큰소리 하신 것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아부지는 평생 부지런하시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75세에 며칠 앓지도 않으시고 편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이쁜이라고 불리셨는데 그게 진짜 이름인지 이뻐서 그렇게 불리셨는지 모르지만 큰 고생 없이 남편 사랑받으시며 사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내리 다섯명을 낳으셨는데 꼭 딸을 한명 갖고 싶어 했다. 딸을 낳기위해 여섯 번째 임신했을 때 점쟁이가 또 아들이라고 해서 이번에 또 아들이면 자지를 잡아 뜯어내불고 딸로 키우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딸이 태어낳고 그게 나였다. 그리 어렵게 마흔하나에 얻은 귀한 외동 딸이었던 나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고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키우셨다.


내가 어릴적 어느 겨울 날 엄마와 함께 도암에 있는 큰 집에 제사하러 갔었는데 아부지가 우리 걱정을 하여 포대기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집으로 오던 길에 아부지를 만났는데 아부지가 포대기로 나를 싸서 등에 업어주셨는데 따뜻한 아부지 등에 꼭 붙어 업혀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4살때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이것이 아마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인것 같다.


오빠 섯명도 나를 한번도 때리지 않고 다 잘 대해주었다. 큰오빠 이름은 김성수였는데 나와는 스무살 차이가 났다. 부모가 열 다섯살에 결혼을 시켰는데 그때 엄마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다. 그런데 열 다섯살 된 며느리가 얼마나 시어머니를 공경하던지 서른 다섯에 부엌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평생 며느리에게 공양 받으시며 91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하루 앓고 편하게 돌아가셨다.


둘째오빠 이름은 김생수였는데 나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었다.

셋째 오빠 김남수 넷째오빠 김맹수도 나를 평생 사랑해 주셨다. 그런데 막내 다섯째 오빠 김기수는 군대 다녀와서 스물 다섯 되던 해에 가슴을 도려내면 살 것 같다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 그때 오빠가 "저 꽃은 져도 내년에 다시 필텐데 나는 가면 어찌되냐"고 말하며 한탄하던 소리가 생생하다.

가난한 집안이라 오빠들은 모두 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결혼해서 다 가정을 잘 꾸리고 사시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나만 남았다.


난 어렸을 때 학교에 정말 가고 싶었다. 큰 오빠 아들이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오빠는 자기 아들은 학교를 보냈지만 나는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도 둘째 오빠가 나에게 가나다라 책을 가지고 한글 쓰는법을 세세히 가르쳐주어서 나는 한글을 배워서 글을 읽고 쓸수가 있었다. 또 계산을 하려면 구구법을 알면 쉽다고 해서 오빠가 적어준 구구단을 밤을 새며 외워서 나중에 장사할 때 잘 써먹을 수 있었다.

난 비록 국민학교도 못 다녔지만 이렇게 한글과 산수를 익혀서 글을 읽고 쓸수 있었고 또 구구법을 외워서 계산을 빨리 할수 있었음으로 평생 무식하단 소리 안 듣고 살수 있었다.


몇년 전 치매검사를 받으러갔는데 학교를 어디까지 다녔느냐고 물어서, 부끄럽지만 학교를 못 다녔다 말하고 치매 검사을 받았었다. 그때 숫자 계산하는 걸 내가 다 맞추니 학교 안 다녔다는 것 거짓말이 아니냔 말을 듣기도 했다. 또 셋째 딸 손주들을 볼때 손주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는데 안 사돈이 자기는 글을 못 읽는데, 나보고 어떻게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하면서 학교를 다녔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같은 마을에 있는 네 집 중에 한집이라도 딸을 학교에 보냈으면 나도 학교에 갔었을텐데 아무도 학교를 안 보내서 나도 학교를 가지 못했던 게 많이 아쉽다. 어느  봄날에 판촌에서 학생들이 냇가로 소풍을 온 것을 보고 나는 너무 속이 상해 들고 있던 나물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집에와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친구들과 함께 독차기도 하고 고무줄 넘기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던 것 같다. 열 일곱에 시집 오기전까지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배짜기 기술과 농사 기술을 다 배우고 일도 많이 했었다. 결혼 전까진 학교는 못 다녔지만 부모 사랑 많이 받았고 오빠들 사랑 많이 받으며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지냈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만약 내가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장사를 해도 크게 하고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새끼들은 꼭 공부시켜야겠다 결심했고 혼자 벌어 열두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8남매 모두 공부를 가르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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