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인생 이야기

어머니 인생 이야기 / 김맹임 88

by 김동관

1. 나의 어린 시절


난 음력으로 1937년 3월 28일에 전라남도 남평읍 우산리의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집이 네 채있는 월평마을로 이사와서 살았다. 아버지 이름은 김형보 였고 어머니 이름은 이 이쁜이라고 불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끔찍히 생각해 아침마다 부엌에 뗄감나무를 한 짐 들여놓아주시고 아궁이의 재를 깨끗히 치워주신 후, 따뜻한 물을 한 솥 끓여주셨다. 이렇게 어머니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고 아끼셨다. 나는 아부지가 어무니한테 한 번도 큰소리 하신 것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아부지는 평생 부지런하시고 건강하게 사시다가 75세에 며칠 앓지도 않으시고 편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이쁜이라고 불리셨는데 그게 진짜 이름인지 이뻐서 그렇게 불리셨는지 모르지만 큰 고생 없이 남편 사랑받으시며 사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내리 다섯명을 낳으셨는데 꼭 딸을 한명 갖고 싶어 했다. 딸을 낳기위해 여섯 번째 임신했을 때 점쟁이가 또 아들이라고 해서 이번에 또 아들이면 자지를 잡아 뜯어내불고 딸로 키우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딸이 태어낳고 그게 나였다. 그리 어렵게 마흔하나에 얻은 귀한 외동 딸이었던 나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하고 애지중지하며 귀하게 키우셨다.


내가 어릴적 어느 겨울 날 엄마와 함께 도암에 있는 큰 집에 제사하러 갔었는데 아부지가 우리 걱정을 하여 포대기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집으로 오던 길에 아부지를 만났는데 아부지가 포대기로 나를 싸서 등에 업어주셨는데 따뜻한 아부지 등에 꼭 붙어 업혀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4살때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이것이 아마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인것 같다.


오빠 다섯명도 나를 한번도 때리지 않고 다 잘 대해주었다. 큰오빠 이름은 김성수였는데 나와는 스무살 차이가 났다. 부모가 열 다섯살에 결혼을 시켰는데 그때 엄마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다. 그런데 열 다섯살 된 며느리가 얼마나 시어머니를 공경하던지 서른 다섯에 부엌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평생 며느리에게 공양 받으시며 91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 하루 앓고 편하게 돌아가셨다.


둘째오빠 이름은 김생수였는데 나에게 한글과 구구단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었다.

셋째 오빠 김남수 넷째오빠 김맹수도 나를 평생 사랑해 주셨다. 그런데 막내 다섯째 오빠 김기수는 군대 다녀와서 스물 다섯 되던 해에 가슴을 도려내면 살 것 같다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치료도 못 받고 돌아가셨다. 그때 오빠가 "저 꽃은 져도 내년에 다시 필텐데 나는 가면 어찌되냐"고 말하며 한탄하던 소리가 생생하다.

가난한 집안이라 오빠들은 모두 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결혼해서 다 가정을 잘 꾸리고 사시다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나만 남았다.


난 어렸을 때 학교에 정말 가고 싶었다. 큰 오빠 아들이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오빠는 자기 아들은 학교를 보냈지만 나는 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도 둘째 오빠가 나에게 가나다라 책을 가지고 한글 쓰는법을 세세히 가르쳐주어서 나는 한글을 배워서 글을 읽고 쓸수가 있었다. 또 계산을 하려면 구구법을 알면 쉽다고 해서 오빠가 적어준 구구단을 밤을 새며 외워서 나중에 장사할 때 잘 써먹을 수 있었다. 난 비록 국민학교도 못 다녔지만 이렇게 한글과 산수를 익혀서 글을 읽고 쓸수 있었고 또 구구법을 외워서 계산을 빨리 할수 있었음으로 평생 무식하단 소리 안 듣고 살수 있었다.


몇년 전 치매검사를 받으러갔는데 학교를 어디까지 다녔느냐고 물어서, 부끄럽지만 학교를 못 다녔다 말하고 치매 검사을 받았었다. 그때 숫자 계산하는 걸 내가 다 맞추니 학교 안 다녔다는 것 거짓말이 아니냔 말을 듣기도 했다. 또 셋째 딸 손주들을 볼때 손주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는데 안 사돈이 자기는 글을 못 읽는데, 나보고 어떻게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하면서 학교를 다녔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사실 같은 마을에 있는 네 집 중에 한집이라도 딸을 학교에 보냈으면 나도 학교에 갔었을텐데 아무도 학교를 안 보내서 나도 학교를 가지 못했던 게 많이 아쉽다. 어느 봄날에 판촌에서 학생들이 냇가로 소풍을 온 것을 보고 나는 너무 속이 상해 들고 있던 나물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집에와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친구들과 함께 독차기도 하고 고무줄 넘기도 하면서 즐겁게 보냈던 같다. 열 일곱에 시집 오기전까지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배짜기 기술과 농사 기술을 다 배우고 일도 많이 했었다. 결혼 전까진 학교는 못 다녔지만 부모 사랑 많이 받았고 오빠들 사랑 많이 받으며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지냈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만약 내가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장사를 해도 크게 하고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새끼들은 꼭 공부시켜야겠다 결심했고 혼자 벌어 열두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8남매 모두 공부를 가르쳤었다.


2. 결혼과 시부모


내가 열 일곱살 되던 해에 옆 동네 중매쟁이가 와서 중학교 나온 학교선생인데 선을 한번 보라고 해서 엄마와 큰 오빠가 보러갔었다. 신랑을 본 후 엄마는 신체가 약해 보여 별로 맘에 안들어 했는데 큰오빠가 사람 괜찮은데 왜 그러냐고 해서 만나보기로 했다. 그래서 신랑이 우리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선을 보러왔는데 나도 맘에 들었는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그해 음력 1953년 11월 12일 월평마을 우리집에서 치뤘다. 신랑은 걸어서 우리집에 왔지만, 나는 결혼식 마친 후에 하루 자고 다음 날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갔다. 집은 33가구가 사는 전남 나주군 다도면 판촌리 상판 마을의 가장 끝에 있는 감나무가 13그루 있는 초가삼간 집이었다. 이렇게 결혼해 8남매를 낳고 68년을 함께 살다가 먼저 간 신랑 이름은 김양길인데, 1933년 5월 24일(음)에 태어나 2022년 2월 10일(양)에 세상을 떠났다.


결혼 당시 동네 사람들은 내가 친구들 중에서 제일 시집을 잘 갔다했지만, 결혼 후 내 인생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져버린 것 같았다. 여섯 형제 중 막내 외동딸로 태어나 엄마 아빠의 특별한 사랑을 많이 받고 살다가 시집을 왔는데, 결혼 후 난 남들 사는 삶을 하루도 못 살고 고생만 했다.


난 욕심이 많아 결혼전에 농사일, 배짜는 일과 살림하는 것들을 다 배웠었다. 시집 와서 농사일과 함께 배 짜는 일을 했는데, 목화를 키워 솜을타서 배를 짠 후 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난 열 일곱에 키도 다 커서 여섯필짜리 배를 짤 때는 온 몸을 다 써서인지 삭신이 다 아팠는데 시어머니는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셨다. 결혼 후 신랑은 일은 안하면서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이 되어 소 키우고 농사와 배를 짜며 신랑이 나주 원예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공부를 시켰다.


시아버지 함자는 김성진, 시어머니 함자는 한귀례이다. 시아버지는 장남이었는데 남동생이 한명 있었다. 그는 젊어서 일본에 건너가 돈을 많이 벌었지만 빨리죽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시아버지의 아버지가 지었는데 집을 뺑 둘러 감나무 13그루가 있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을 감나무 집이라고 불렀다.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감을 실컷 먹었는데, 떫은 감을 된장에 묻어두어 감 장아지를 만들어 반찬으로 먹기도 했고 대봉은 홍시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아서 가용으로 썼다.


시아버지는 젊어서 힘이 세 상머슴값을 받고 일을 하셨다는데 몸을 너무 써서인지 일찍 몸을 상해 내가 결혼해 왔을 때는 농사일을 전혀 하지 못하셨다. 그래도 집에서 손주들은 다 봐주셨는데, 막내 천성이까지 다 키워주셨다. 86세에 광주 방림동 집에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딸 둘 아들 하나 낳고 살았지만 효도 한번 제대로 못 받고 6년간 치매로 앉은뱅이가 되어 사시다 정월 초하루 전날에 돌아가셔서 그날 바로 출상했는데 그때가 81세 셨다. 너무 불쌍하게 사시다 돌아가셔서 내가 많이 울었다. 돌아가신 후 시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시고 좋은 옷 한벌 못 입고 사신 것이 마음 아파서 내가 시장에 가서 제일 비싼 옷을 한벌 사와 시어머니 묘지에 가서 태워드렸다.



3. 생선장사


다도에서 천막을 치고 도임이와 같이 살면서 그 해 농사한 것을 다 추수하고 11월 달에 광주로 올라 왔는데 그 때 내 나이가 서른 아홉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 남편이 10년간 다니던 농촌진흥원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한 상황인데, 하루는 옆집 아줌마가 어디로 일을 하러 가는 것 같아서 무작정 따라 나섰다. 따라가 보니 양동 공판장에서 생선을 받아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먼저 생선을 외상으로 받아서 판 다음 물건 값을 다음 날 갚는 식이었다. 그날은 내가 옆집 아줌마와 같이 장사를 나가서 받아간 생선을 다 팔고 다른 사람것도 팔아주었다. 그래서 다음 날 부터 나도 생선을 떼어 다라이에 갈치, 고등어, 멸치를 나눠 담아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남들이 멀어서 잘 안가는 동네인 오치동, 상무동과 온천동에 가서 생선을 팔았는데 처음엔 이익을 반만보고 물건을 싸게 팔아 단골을 많이 잡았다. 이때 내가 생선 팔러 가면, 사람들이 피부도 좋고 웃고 다니는 이쁜 아줌마 온다고 했다.


하루는 단골을 많이 잡았으니 갈치를 많이 가지고 버스를 타러 갔는데 그날이 토요일이라 학생들이 버스에 많이 탔다. 내가 갈치 담긴 다라를 갖고 버스에 타니 차장이 냄새난다고 계속 다라를 버스에서 내려버려서 오랫동안 버스를 타지 못했다. 나중에야 학생들이 뜸해져 겨우 버스를 탔는데 버스에서 얼마나 설웁던지 차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눈물을 주체 못하고 통곡을 했다.


어느날은 우리집에서 다라이 가지고 버스타러 막 뛰어가는데, 동네에서 공사를 하던 곳을 지나다가 나도 모르게 내 다리 복숭아뼈에 못이 박혔다. 그런데 빨리 버스를 타야해서 그것도 모르고 오치에 도착했는데, 발이 너무 아파 한 아줌마에게 왜 다리가 아픈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양말을 벗어 보니 복성씨에 작은 못이 박혀 있었다. 못을 빼니까 피가 나와서 아줌마가 옥도쟁끼를 가져다 주고 불을 가져다 줘 쬐게 했는데 그 아줌마가 "어떻게 생 살에 못이 박힌줄도 모르고 계셨냐"고 놀랐다. 그리고 그날 장사를 하느라 하루종일 걸어다녔는데 다리가 애려 혼이 났다.


어느날 한번은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는데 김장철이었는지 아줌마가 김장을 하고 있았는데 김치가 너무 맛있게 보였다. 그런데 아줌마가 김치 간좀 보라고 줘서 먹었는데 너무 배가 고팠다. 그래서 아줌마에게 아침밥을 못 먹고 나왔는데 밥 한 숟갈 달라고 했다. 그 아줌마가 식은밥 밖에 없다고 미안해 하면서 물을 끓여서 뜨거운 물에 식은 밥을 말아 주어서 김치에 한 그릇 먹었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있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제대로 밥도 못먹고 나와서 장사를 하다 배가 고프면 100원짜리 막걸리 한 그릇을 마시면 나은데, 100원이면 아침에 자식들 돈을 줄 수 있단 생각에, 배고프면 물만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 밤 늦게 집에 오니 남편은 자고 있고 아침에 내가 해놓고 간 밥이 하나도 없이 빈 밥통만 있었다. 그땐 전기밥솥도 없어서 밥을 바로 할 수 없어 그냥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막걸리 한 그릇 먹고 잤는데 속이 쓰려 혼났다.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용강촌에 가서 물건 떨이하고 다시 양동까지 리어카를 끌고 가고 그렇게 일을 했는데, 어떻게 남편이 하루종일 일하고 온 마누라 먹을 밥도 해놓지 않고 자고 있을 수 있는지 죽을때까지 못 잊을 것 같다.


명월이 지나면 장사가 안되어 집을 짓는 업자인 뒷집 민재 아빠를 따라가서 2층 슬라브집을 짓는데서 노가다를 했다. 하루종일 모레 자갈 섞은 걸 2층 지붕으로 올리고 왔더니 아침에 온 몸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어도 다시 나가 집 세 채를 지었다. 그런데 엄마가 우리집에 오셔서 하루를 쉬고 대체 할 사람을 못 구해 다음날 새벽에 밥을 해놓고 일을 나갔는데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새벽에 노가다 갔는데 사위와 엄마는 자고 있는 걸 보고 울면서 집에 오면서 다시는 너희집에 안 온다고 했는데 그 뒤로 정말 못오시고 돌아가셨다.


어느 겨울날 바람이 불고 눈이 팔팔 올 때 명태 한 박스를 머리에 이고 오치를 갔는데, 한 부잦집 아줌마가 생선을 손질해 주면 다 산다고 해서 펌프우물에서 눈을 맞으며 맨손으로 차가운 물로 언 동태를 힘들게 배따고 손질해주니 손이 벌겋게 되었다. 그때 방에서 내 어머니 나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바람불고 눈 오는 날 저렇게 이쁜 각시를 장사시키네. 아줌마는 남편이 없소?"

"남편 없는 사람 있다요? 남편도 있고 아들 딸들도 많은 대 가족이요."

"서방 복이 있어야지 자식 덕도 보지, 자식들 다 필요없어라. 사람이 태어나 한 번이라도 남편 덕 보고 살아야 늙어서 한이 없지 그렇게 살다 늙으면 한이 돼라.

내가 좋은 사람 소개해 줄테니 시집가시오.

밥도 안해 먹고 편하게 살것이오."

"아니 연세도 드신분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신다요.

우리 자식들은 어찌하라고 버리고 시집을 간다요.

그런 소리 마시요."

그 할머니가 눈에 선하다.


어느날은 생선을 팔러 어떤 부잣집에 들어갔는데 개 밥 그릇에 흰 쌀밥이 들어 있는 걸 보았다. 우리 새끼들은 납작보리쌀이 들어있는 맛없는 정부미 밥을 먹고 사는데 개도 쌀 밥을 먹는 걸 보고 더이상 정부미를 사먹지 않았다.


나중에는 방림다리에서 장사를 했는데 처음에 장이 설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다라이를 들고 장사하다가 경찰차에 실려가 다시는 안하겠다고 하고 풀려났다. 그런데 다음날에 다시 장사를 나갔는데 또 경찰차가 와서 피하려고 다라를 들고 뛰어서 도로를 건너가다 택시에 받혔는데 그냥 일어나서 길가의 집 안에 숨었다. 그런데 경찰이 병원가게 나오라고 해서 나가서 택시는 잘못이 없으니 보내달라고 한 후 병원도 안갔다. 그 후 며칠 온 몸이 아팠지만 양동까지 다니면서 계속 방림다리에 나갔다. 또 한 번은 물을 받아 길을 건너다 오토바이에 받혀 떨어져서 팔이 다 벗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생선장사를 해서 열두식구 먹이고 여덟명 자녀들 모두 다 학교에 보냈다.


4. 내 인생의 노래


나는 노래하기도 좋아하고, 놀기도 좋아하고 춤 추기도 좋아했다. 젊었을 때 노는데 어디에 빠지지 안했고 관광계를 들어 남편 데리고 전국 명소는 다 다녔다.

내 인생 노래를 몇 곡 남기며 내 인생 이야기를 마친다.


"세상에 올때는 내 맘대로 온 것 아니지마는

이 가슴에 꿈도 많았지

내 손에 없는 내것을 찾아 낮이나 밤이나

뒤 볼새없이 나는 뛰었지

이제와서 생각하니 꿈만 같은데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 후회도 많아

스쳐간 세월 아쉬워한들 돌릴수 없으니

남은 인생을 잘 해봐야지

돌아본 인생 부끄러워도 지울수 없으니

나머지 생을 잘 해봐야지"


"바람처럼 스쳐가는 짧은 청춘인데

사랑에 울고 이별에 울고 그러다 가는 인생

있다고 자랑말고 없다고 울지마라

갈 때는 빈손이란다

가는 세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있나

싫어도 너 뿐이고 좋아도 너 뿐인디

세월이 아쉬웁구나

가는 세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있나"


"한 많은 내 청춘아 속절없이 흘렀구나

아들 길러 딸 길러 내 모습이 늙어버렸네

허리 다리 무릎 관절 아픈곳만 생기드라

아~ 내 청춘 어데갔나 세라젬아 고쳐다오

한 많은 내 청춘아 무심하게도 흘렀구나

아들 길러 며느리 주고 딸 길러 사위 주고

눈도 침침 귀도 먹멍 아픈곳만 생기드라

손자 길러 즐거움 찾고 손녀 길러 행복을 찾고

인생이란 그런거지 새큼 달큼 쓴맛 단맛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들아

이 애미는 자나깨나 너희들만 생각한단다

내 아들아 내 딸들아 이 애미를 생각하냐

이 애미는 자나깨나 너희들만 생각한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들아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다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