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3편
아빠의 기억/ 오선희
어릴 적에 소등하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와 내 동생은 옥상에 올라가 “불 꺼!”를 외치고 숨었다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다시 “불 꺼!”를 외치고 달아나곤 했다.
그날은 하필 우리 가족 최애 프로그램인 전설의 고향을 하는 날이었다. 아빠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그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 그 강한 양팔로 이불을 끌어올려 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 주셨다.
“아빠, 괜찮아요?”
“끄떡없어. 재미있게 봐.”
하나도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술을 참 좋아하셨다. 술 드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손에 초코파이 상자를 가득 들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술 드시는 날을 참 좋아했다.
주말에 온 가족이 보문산에 놀러 갈 때면, 빨강·노랑 색색 옷을 입히시고 머리도 가지런히 빗겨 주시며 사진도 찍어 주셨다. 내 사진들을 보면 항상 차렷 자세였다.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왜 사진은 차렷 자세로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내가 아빠를 닮아 잘 살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그 말은 내가 남자답다는 뜻 아닌가. 코도 크고, 손도 크고, 거기다가 어깨까지 넓은 게 너무 싫었다.
내가 5학년이 되던 해, 아빠가 회사에서 승진을 하셔서 우리 집은 며칠 동안 잔칫집 분위기였다. 우리는 이 층집 이웃에서 잠을 자야 했다. 며칠을 그렇게 술을 드시고 즐기시다가, 엄마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내려와 보니 아빠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을지병원에 연락해 응급차가 와서 아빠를 실어 갔지만, 가는 도중 그만 돌아가셨다.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셋째 언니가 갑자기 빨래와 청소를 하길래, 나도 언니 따라 뭔가 하는 척을 했다. 그러고 며칠 후, 엄마는 안방에 병풍을 세우셨고 그 뒤에 아빠의 주검이 계셨다.
나는 슬픔에 젖어 울었다. 하지만 내 동생은 겨우 1학년, 그저 뛰어노는 동생을 보니 더 서러워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아빠의 주검을 지켜보게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보았다. 그땐 그저 주무시고 계신 듯 보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내가 엄마에게서 새로 듣게 된 단어가 있었다. ‘후레자식’.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후레자식 소리 안 듣게 행동거지 잘하라는 말씀이었다.
엄마는 엄한 분이셨는데, 아빠가 안 계신 뒤로 더욱 엄해지셔서 엄마에게서 잔정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한 번은 우리 아이들과 옛날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이 말하길, 내가 엄청 엄하고 무서웠다는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한 부분을 닮아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건, 우리 아이들의 아빠는 나와 달리 잔정도 많고 사랑도 많아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어서, 아이들이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빠와 함께했던 11년. 짧지만, 그래도 아빠에 대한 기억이 내 머릿속에 이렇게 추억으로 남아 있어 감사하단 생각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빠를 닮아 여기까지 살아온 나는, 과연 잘살고 있는 걸까.
강아지와의 인연/ 오선희
내 인생에서 동물과의 첫 만남은 그리 좋게 시작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 둘째 언니가 병아리 다섯 마리를 사 왔다. 종이박스 안에 있는 샛노란 병아리 다섯 마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삐약삐약 울어대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먹이를 주면 입을 벌리며 더 큰 소리로 삐약삐약거렸다.
며칠이 지나 어느 정도 힘이 생기자 날갯짓을 하며 박스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병아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딨 지? 어디 있니, 얘들아.”
찾다가 이불을 개는 순간, 그 밑에서 다섯 마리가 모두 압사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불 밑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고, 잊을 수가 없다.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어느 집 앞마당에서 개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그 순간—아니, 찰나라고 해야 할까—그 개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물었다.
나는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이러다 광견병에 걸려 죽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그날 이후 나는 개가 너무 무서워졌다. 개만 보아도, 아니 개 짖는 소리만 들어도 기겁을 하고 멀리 줄행랑을 치기 일쑤였다.
고3 때, 우리 식구는 대전에서의 삶을 모두 접고 서울로 이사 왔다. 처음 학교에 갔을 때 반 친구들이 “너 조용필이 누군지 아니?” 하며 촌년 취급을 했다. 그런데 한 명, 나를 그저 편하게 대해 주던 친구가 있었다. 변계원.
그 친구 집이 우리 집과 같은 방향이어서 함께 다니다가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시험 때만 되면 친구 집에서 자며 같이 공부했다. 친구 집은 넓고 아주 잘살았다. 계원네 집에는 복돌이라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집 안에서 자라는 강아지였다.
개가 나에게 다가올까 봐 무서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계원이의 강아지였기 때문에 참고 싶었다. 어느 날도 시험공부를 하다가, 계원이가 가야금 과외를 갔다 오겠다며 나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갔다.
나는 할 수 없이 복돌이와 한집에 남게 되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복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내가 문을 꽉 닫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지, 어쩌지 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가 돌아왔고, 우리는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다. 다행히 금세 찾을 수 있었지만, 미안함과 걱정, 불안으로 한동안 마음을 졸였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동물에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우리 가족에게 동물은 절대 안 돼’ 하던 나에게, 고양이가—그것도 두 마리나—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을 혼내고, 화도 내고, 짜증도 부리고, 위협도 하고 정말 안 해 본 게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찰리와 샬롯은 내 마음에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밥 먹는 모습을 보면 예쁘고,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쥐를 잡아 오면 고맙고, 높은 난간을 걸어 다니면 신기하고, 자기 몸을 그루밍하면 깨끗해 보이고, 화장실 가서 쉬야를 하면 참 잘했고, 응가를 하면 더 잘했고, 늘어지게 자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내 안에 있던 동물과의 악연이 찰리와 샬롯으로 인해 모두 사라진 것 같다. 이제는 고객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만나도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먼저 다가가 쓰다듬어 주고 뽀뽀도 해 준다.
나에게 찰리와 샬롯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상처를 조용히 치유해 준 치료사와도 같다.
고맙다, 얘들아.
사랑한다, 얘들아.
덜 가지는 연습/ 오선희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경작하는 땅에 대한 소유권이 중요해졌다. 국가는 그 권리를 인정하고 법적으로 보장하며 제도화했고,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토지는 중요한 생산수단이자 사유재산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 평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땅이야”라고 말하던 그 순간부터, 우리의 불행도 함께 시작되었다. 울타리가 생김으로써 타인은 잠재적인 침입자가 되었고,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함께 만들고 함께 나누어 쓰던 도구와 물건들을 이제는 공유할 수 없게 되었고, 각자는 자기 몫을 따로 소유해야만 했다. 사람의 소유욕은 끝이 없고, 또 비교적이다. 집은 남보다 더 커야 하고, 침대는 더 럭셔리해야 하며, 식탁과 TV도 더 좋아 보여야 한다.
내가 클리너로 일하며 여러 집을 다니면서 느낀 공통점이 있다. 소유한 물건이 너무 많아 책상에, 의자에, 책꽂이에, 하물며 침대 위에까지 넘쳐난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들은 제 역할조차 하지 못한다.
더스팅을 할 때마다 나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했다. 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모두 내려놓고 닦은 뒤 다시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그냥 지나칠 것인가. 어느 집은 물건이 너무 많아 이사 갈 집에 다 들어가지도 못해, 스토리지 창고를 빌려 거기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은 규모 9.0의 초대형 지진으로 ‘지구의 축조차 뒤흔들었다’고 전해졌다. 지진 자체뿐 아니라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2만여 명의 사상자와 5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 이후 많은 일본인들의 ‘소유’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들의 집, 가구, 물건들, 그리고 이제는 들어갈 수조차 없는 그들의 땅. 소유란 과연 무엇인가.
물건이 적어지면, 하나의 물건을 한 가지 용도로만 쓰지 않고 다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진 물건들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지닌 것들의 소중함. 그 물건을 쓸 때마다 감사하게 되고, 그래서 더 아껴 쓰게 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간소하게 살아가는 것, 적게 소유하며 사는 것이 가능할까.
이불 두 장으로 밤에는 펴서 잠자고, 아침에는 잘 접어 벽에 기대어 소파처럼 사용한다.
세수하고 머리 감고 샤워할 때, 비누나 샴푸를 쓰지 않아 본다.
얇은 수건 한 장으로 얼굴과 몸, 발을 닦고 바로 빨아 바로 말린다.
작은 서랍장 하나에 옷을 넣어 두고, 식사할 때는 식탁으로, 높은 곳에 닿아야 할 때는 받침대로 쓴다.
다용도 컵 하나로 물, 차, 커피를 마신다.
냄비 하나로 음식을 하고 물도 끓인다.
신발 한 켤레를 해질 때까지 신다가, 닳으면 버리고 새 신발을 산다.
부엌을 간소화해 요리의 즐거움을 느껴 본다.
나는 집을 채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둘러보면 여전히 짐이 많다. 이제부터 나는, 하루하루를 조금씩 더 덜어 내며 살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