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5편
아내의 빈 자리/ 유인희
당초 계획대로라면 11월 3일에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영주권자는 5년마다 한번씩 해외에서 호주 입국 시 정부에 신고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미처 챙기지 못해 3일 뒤인 6일 아침에 도착했다. 5년이 길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탓에 출국 당일, 공항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하며 동시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행히 아들이 바로 서류를 보완해서 신고했고 6일 아침, 브리즈번 공항에서 몰골이 초췌한 남편과 룰루를 만날 수 있었다. 거의 3주 동안 주부가 집을 비웠으니 그럴만했다.
이제 일상으로 복귀했으니 먹거리를 채우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비행기 멀미에 날씨까지 더워서 몹시 피곤했다. 대문을 열고 가방도 옮기지 않은 채 화단 먼저 체크했다. 아끼던 청상추가 웬만한 배추만 했다. 상추는 밑 부분을 자주 따 줘야 부드러운 새 잎을 오래 먹을 수 있는데, 물만 주고 제때 솎아주지 않아 뻣뻣해져 쌈 채소로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들깨는 어느새 씨가 쏟아져 싹을 틔워 군락을 이뤘는데 뜨거운 햇빛에 억세지고 구멍 투성이었다. 봄에 멀치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음지식물들 주변은 잡초가 그득했고, 난초와 코스모스는 청아한 꽃 대신 마른 꽃잎과 씨앗을 어설프게 매달고 있었다.
마당에 흩어져있는 룰루 장난감 역시 하나같이 흙이 묻어 꼬질꼬질했다. 온통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조바심이 생겨 대충 정리를 시작하는데 아뿔싸! 엔젤 카네이션은 바짝 말라 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아담한 키에 사계절 내내 꽃을 피워 특별히 아끼고 정성을 들였는데, 몇 주 사이 갈증에 시달리다 결국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여행 떠나기 전, 물 주기는 절대 빼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호스가 짧아 물이 닿지 않는 곳은 방치한 탓이다. 화가 치밀었지만 식물에 대해 잘 모르니 조심스러워 건드리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마당 한가운데 올리브나무의 기분 좋은 속삭임과 흔들림을 바라보며, 더 이상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영양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지만 남편과 강아지는 그나마 건강해서 내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청소검사받는 학생처럼 내 표정을 살피던 남편이
“상추나 깻잎은 먹을 사람이 없어서 뜯지 않았지만 울타리 콩은 모두 따서 냉동실에 넣었어. 어제는 뒷마당 잔디도 깎았지.” 라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요? 잘했네. 한번 가볼까?”
발걸음을 뒷마당으로 옮겨 울타리를 콩을 확인하니 수확 후, 뒷정리를 하지 않아서 콩 줄기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꾹 참고 있다가 또 잔소리가 터졌다.
“콩을 딸 때는 반드시 한 손으로 넝쿨을 잘 잡고 따야 넝쿨이 상하지 않아. 이게 뭐야? 무더위 견디고 애써서 열매 맺어놓으니 얄밉게 쏙 따가고 푸대접한다고 콩이 화났겠다.” 라며 훈계조로 이야기하다가 문득 ‘만약 남편이 3주 집을 비운다면?’에 생각이 멈췄다.
그가 집을 비운다면 아무래도 집안일을 덜하니 시간은 많지만 외출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운전대만 잡으면 긴장해서 식은땀이 나니 우버(Uber)를 부르든지 외출을 포기하든지 어쨌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청소기에 먼지가 쌓이면 분해해서 털고 씻어내는 수고도 해야 한다. 더운 날 에어컨이나 냉장고에 문제가 생기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카톡으로 빨리 오라고 닦달할 것이다. 게다가 밤이면 야행성 동물들의 부스럭거림에 몇 번이고 문단속을 하며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잠깐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고마움이 훨씬 큰데,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지나치게 까칠하고 투덜거렸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꼬리를 내리며
“이 더위에 어떻게 잔디를 깎았어? 나랑 함께 했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아주 고생했네.” 했다.
가끔은 일부러라도 며칠씩 빈자리를 만들어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고맙다 고맙다/ 유인희
셋째 동생이 자신의 아들 결혼식 날짜를 상의했다. 우선 반가웠고 4월 부활절쯤으로 날짜를 잡았다. 친정, 시댁 양가 조카들 중 10여 명이 아직 미혼인데 해외 살면서 그들의 결혼식에 일일이 참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특별히 그 조카의 결혼식만은 꼭 참석하고 싶어 날짜를 정한 후 당사자의 근황을 물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연극하다가 부모와 동생들을 돌볼 요량으로 컴퓨터 관련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다행히 수입이 괜찮아 동생들 용돈은 물론 신혼집을 자력으로 마련했다고 했다. 신붓감은 함께 연극했던 친구로 예의 바르고 책임감 강한 부산 아가씨라고 자랑했다.
셋째 동생은 우리 자매들 중 가장 미인이며 센스가 남달라 직장이나 친구지간에도 인기가 많았다. 화려한 연애 끝에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착하기만 하고 실속 없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결국 큰 조카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 두 아이를 시댁에 맡기고 이혼했다.
당시 우리는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기보다는 ‘지독한 애’라며 따돌리기 바빴었다. ‘오죽하면 자식을 떼어놓고 왔을까?’ 한 번쯤 입장 바꿔 위로할 법도 했는데 틈만 나면 비난하고 부끄러워했으니, 이혼보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더 컸을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이후 그녀는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한 남자와 재혼하여 딸 하나를 더 낳고 시댁에 맡겨놨던 두 아이를 데려와, 한 지붕 밑에 살게 되었다. 큰 조카가 중학교 1학년, 작은 조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사춘기였음에도 두 조카들은 새 환경에 잘 적응했고 새 여동생과도 우애 있게 지냈다.
어려서 마음고생을 했음인지 그 환경을 감사하게 여기며 자립심 강한 젊은이들로 성장해서 이제 가정을 이룬다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모난 곳 없이 외모처럼 동글동글 잘 자란 큰 조카가 미덥고 고마워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문득 내가 조카 나이 때쯤 막내 고모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고맙다, 고맙다.”가 생각났다.
집안의 장녀였던 나는 뭐든지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취업은 했으나 그 도시에 연고도 없고 형편도 좋지 않아 당장 거주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막막한 처지를 알게 된 올드미스인 막내 고모가 당신의 자취방에서 함께 살기를 제안했다. 고모라면 아버지의 동생으로 직계가족인데 명절 때 몇 번 만난 것 외에는 별 교류가 없어 촌수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고, 한참 겉멋까지 들어 그 제안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못 이기는 체 얹혀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그녀는 나를 친 자식처럼 돌봐주었다. 옛말에 ‘엄마 없으면 이모는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어도 고모는 어렵다.’고 했는데 그녀는 예외였다.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열심히 돈 벌어 동생들 학비 조달하는 내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성심성의껏 알뜰하게 나를 챙겼다. 고구마와 알밤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박스에 고구마 떨어질 일 없이 채워놓았고 틈틈이 알밤을 사 와 주전부리로 삶고 깎아주었다. 동그스름하고 하얗게 깎인 알밤을 받으며
“고모도 한 개 드세요.”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불만 씹듯 오도독 심술궂게 먹기 바빴다. 상황이 이러면 조카라도 얄미워서 매정하게 대했을 법한데
“잘 먹어서 좋다, 고맙다, 고맙다.”
했다. 하루에 두 번씩 정성껏 챙겨 먹이고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정갈한 밥상을 어른 밥상처럼 모셔 놓곤 했었다. 가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 똑같은 분위기와 어조로 “고맙다, 고맙다.”
하셨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모의 혹인데 왜 내가 고마운 걸까? 아마 내가 있으니 외롭지 않아서 고맙다고 하시나 보다.’
그렇게 제 잘난 멋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돼보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특별히 뭘 해줘서가 아니라 피붙이가 세상이나 부모 원망 안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기특하고 고마워 매 순간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지금은 우리 때와는 달리 열심히 산다고 해서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골목골목 뜻밖의 복병이 때론 지치고 힘들게 하는 무한 경쟁시대라서 더 치열하고 힘들다. 그래도 사회구성원으로서 맡은 바 역할 다하고, 용감하게(?) 결혼하고 자식도 낳겠다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돌아오는 4월 부활절에는 열일 제쳐놓고 기쁜 마음으로 결혼식에 참석해 마음껏 축하하고 “고맙다.” 말하고 싶다. 그러면 조카는 젊었을 때의 나처럼
‘먼 길을 오셨으니 내가 감사한데 왜 이모는 거꾸로 고맙다고 하실까?’
라며 알쏭달쏭 고개를 갸웃할 것 같다.
말똥 예찬/ 유인희
식물의 생육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과 햇빛으로 거기에 거름을 더하면 꽃과 열매 등 결실이 튼튼해진다. 이사 와서 척박한 땅을 화단으로 만들 때, 우선 잡초를 제거하고 계분(鷄糞)이 주재료인 거름을 듬뿍 뿌렸었다. 그랬더니 누릇하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식물들이 기운을 차려 화단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거름의 효과를 확인한 우리는 냉장고에 식자재 채우듯, 동물의 배설물을 발효시킨 거름을 항상 서너 부대씩 준비해 놓았었다.
그러다가 교외에 다니면서 말똥을 알게 되었다. 도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렵지 않게 말 키우는 집을 만날 수 있었는데, 집 앞에 무인 판매대를 설치하고 말똥을 자루에 담아 판매하는 것을 보았다. 자루크기에 따라 3~5불까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시중에서 판매하는 다른 동물 거름보다 2불 정도 싸서 나갈 때마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끔 공짜도 있어서 숨은 보물 찾은 듯 기쁜 마음으로 낑낑거리며 끌고 온 적도 있었다.
주로 풀을 뜯는 말의 배설물은 냄새가 심하지 않아 화단 가장자리에 모아놓고 필요할 때마다 요긴하게 사용했다. 말 주인은 처치 곤란한 배설물을 돈으로 만드니 좋고 우리는 보다 저렴하게 거름으로 이용할 수 있어 좋았다. 거기에 식물들의 생육에 도움이 되니 우리의 작은 관심은 뜻밖에 자연과 사람 모두에게 아주 유익한 자연보호 실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와 함께 킹가로이(Kingaroy)라는, 브리즈번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에 여가생활을 위해 땅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곳은 농장과 목장이 많아 말들이 풀을 뜯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땅의 전 주인인 앤드류 역시 말 두 마리를 방목하고 있어 땅 주변에 배설물이 많았다. 파리 떼가 들랑대는 되직한 똥부터 마른오징어처럼 납작해진 똥 그리고 이미 흙이 되기 시작한 똥 등 똥 천지였다. 순간 ‘아 거름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어 더럽다는 생각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당장 필요한 부동산이 아닌 노후를 위한 놀이터를, 그것도 아주 멀리 구입했다는 소문을 들은 친구들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땅의 구입목적과 계획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그 땅에 대해 대략 설명하면서 근처에 물과 거름이 많으니 당장 동양인들이 좋아하는 매실나무를 100그루 정도 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국의 수도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쨌든 친구의 일이니 적극 돕겠다며 격려했다. 친구들의 긍정적 반응에 용기를 얻은 우리는 일주일 후 주말, 그곳에 갔다.
아담한 전원을 생각했던 친구들은 첫눈에 실망했을 법도 한데, 말들의 배설물을 보면서 “거름 값은 벌었다”며 너스레를 떨어 한바탕 웃으며, 소꿉장난 하듯 일을 시작했다. 남성들은 호스를 연결해 물을 준비하고 여성들은 30cm 정도의 구덩이를 채울 말똥을 모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구덩이 옆만 살펴도 거름으로 쓰일 배설물이 많으니 잠깐사이 구덩이를 채울 수 있었다. 특히 “실제 쌀 나무를 본 적이 없다” 는 깔끔이 서울 아줌마가 너무 열심히 반갑게 똥을 주워 나르는 모습은 우정의 진면목을 느끼게 했다.
문득 조선후기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 한 장면이 생각났다. 당시 그는 사대부들이 명분론을 내세워 청나라를 배척하는 상황에서도, 백성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해 발전된 문물이 보고 싶었다. 마침 8촌 형이 황제의 생일 축하연에 사신(使臣)으로 선발되자 자제군관자격으로 함께 했고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 <열하일기>다. 그 내용 중, 북경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이 깨어진 기와와 냄새나는 똥거름이라고 했다.
똥오줌이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 같이 아까워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 칸에다 쌓아두는데 혹은 네모 반듯하게 혹은 여덟 모가 나게 혹은 여섯 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든다. 똥거름을 쌓아 올린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중>
조선보다 문물이 훨씬 앞선 청나라에서는 가장 더러운 똥조차도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도구로 이용하니 “우리도 본받자” 는 이야기다. 시대의 이정표였던 선생은 <열하일기> 속의 똥 예찬뿐만 아니라 똥 나르는 사람을 ‘예덕선생’이라 부르며 예우했다. 위의 글처럼 똥은 보기에는 더럽고 혐오스럽지만 자신을 썩혀 생명을 키워내는 소중한 존재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줍고 구덩이에 묻는 말똥들 역시 땅의 기운을 북돋아 어린 나무들을 건강하게 길러내고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할 자양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번야 마운틴(Bunya Mountain)/ 유인희
우리의 꿈동산 킹가로이에서 ‘번야 마운틴’ 이정표를 따라 20분 정도 달리면 뽀얗게 먼지가 올라오는 비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이쯤이면 동네어귀의 장승처럼 사람 키 높이의 손바닥 선인장들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검문하듯 곳곳에 서 있다. 선인장이 많은 멕시코에서는 식자재로 사용한다는데, 저렇게 투박하고 위협적인 선인장이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얼마나 먹을 것이 없으면 저걸 먹으려 했을까? 또 먹거리로 정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이 있었을까? 를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소나무 숲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차이로 일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라 꼴깍 침만 삼키며, 당장 호랑이가 나타나도 이상할 것 없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탐험가처럼 몇 분 더 달리면 잔디가 단정한 언덕이 나타난다. 개성을 뽐내는 집들과 방문객들을 위한 작은 카페가 서너 군데 보이니 휴~ 그제야 숨이 편해졌다.
이곳의 첫인상은 조선시대 의적이었던 임꺽정의 드라마 속 무대 ‘청석골’ 같았다. 사실 깊은 산골이라는 것 이외에 두 지역 사이 공통점이 없는데 왜 이 산을 가본 적도 없는 ‘청석골’ 같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청석골’이 깊은 산속의 대명사로 뇌리에 자리매김한 것 같다.
예약한 숙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데 곳곳에 왈라비(Wallaby)가 앉거나 혹은 누운 자세로 차와 사람을 번갈아 감상하고 있었다. 왈라비는 캥거루과의 유대동물로 캥거루보다는 좀 작고 온순해 보였는데, 간혹 암컷의 주머니에 새끼가 있어 우리 역시 “귀엽다”를 외치며 그들을 감상했다. 숙소의 베란다에 나가보니 놀랍게도 곳곳에 왈라비 떼였다. 얼핏 사람보다 많은 것 같았는데 한 무리의 암컷 왈라비들이 새끼들의 재롱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키즈 카페” 같다며 어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왈라비들과 공유했다.
산책길에서 만난 번야 소나무(Bunya Pine)는 특별했는데 이 나무가 많아 산 이름을 번야 마운틴이라 부른다고 했다. 내방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안내책자를 보니 1800년대까지 원주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 나무의 열매인 솔방울이 그들의 중요한 먹거리였다는데 아무리 커도 솔방울이 어떻게 먹이가 될 수 있을까? 의아했다. 그 열매의 크기는 수박만 했고 무게는 7~10 Kg 정도였으며 씨앗도 150개 정도였다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먹거리가 풍부한 지금도 그 씨앗은 훌륭한 단백질원으로 귀하게 쓰인다고 했다.
그렇게 크고 무거운 것을 종(種) 보존 혹은 인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키워냈을 그 위대한 소나무를 쓰다듬으며 시야를 나무 끝 쪽으로 향했다. 침엽수 특유의 짙은 초록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와 기세로 당당히 서 있었는데 위로 갈수록 가지가 짧아져 전체적인 윤곽이 피라미드 같았다. 그 나무 밑에 서 있는 우리는 작은 인형처럼 느껴졌다.
범접할 수 없는 의연한 기상을 가진 이 나무는 많은 가지를 층층이 거느리면서도 지주(支柱)는 전혀 굽지 않았는데, 상흔이 많아 수 천 년 역사의 산 증인다운 면모를 보였다. 묵은 곁가지들이 아래로 떨어질 때 생긴 상흔들은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심정처럼 깊이 패여 있어 눈시울이 뜨거웠다. 숭고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감탄하며 웃고 즐기는 동안 번야 마운틴에 저녁이 왔다. 일행은 석양을 배웅하기 위해 숙소 근처의 Fishers Look Out에 갔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고 모인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간단하게 자리를 펴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 들꽃을 사진에 담는 사람,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한결같이 설레는 표정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거나 서늘하고 온갖 초목들은 춤추고 인간들은 탄성과 겸허함으로 조응했다. 석양은 만족한 듯 붉다가 묵직한 파랑과 보라를 연거푸 선보이더니 마침내 검은 보랏빛을 왕창 토해냈다. 대 자연의 위대함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신성한 제단처럼 보이는 번야 파인을 바라보며, ‘찰나’나 ‘순식간’ 혹은 ‘영원’ 같은 개념들을 곱씹기만 했다.
1800년대의 원주민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끝없이 감사해하며 별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밤새 속삭이다 정령들의 수호아래 편히 잠들었다.
요리 선생/ 유인희
‘곤드레 나물밥 했어요. 시간 되면 함께 해요.’
문자를 보낸 주인공은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선생’으로 불린다. 그동안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일 년 중 거의 절반을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일해서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국경과 주경계가 봉쇄되는 바람에 자의 반 타의 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 우리 둘째 아들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최근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2남 2녀와 5명의 손주를 둔 그녀는 요리가 취미인데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 대접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다. 해마다 김장은 기본이고 여러 가지 계절 채소로 알록달록 피클을 만들어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게 함은 물론, 친정엄마처럼 이것저것 봉투에 싸서 들려주는 아주 고마운 친구다.
부창부수라고 요리 잘하는 아내를 둔 그녀의 남편은, 그동안 돌보지 못해 풀이 무성했던 화단을 옥토로 만들어 고추, 상추, 깻잎, 부추 등 한국인들에게 요긴한 채소들을 가꾸고 나누며 아내의 실력발휘에 일조한다. 근처에 품질 좋고 저렴하기로 유명한 식품점이 있는데, 재고정리 정리한다는 소문이 돌면 아내의 주문대로 빠짐없이 사다 주는 수고도 마다치 않는다. 덕분에 그 댁에 가면 고구마, 양파, 생강, 당근 등 주로 구근식물들이 박스에 담긴 채 변신을 기다리고, 냉장고에는 신선한 야채들이 많아 팬더믹 때문에 기죽고 움츠러든 일상에 활력과 풍요로움을 준다.
요리 실력에 비해 부엌이 좀 작은 편인데 현모양처형인 그녀는 한마디 불평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식공장’처럼 대식구를 위해 끝없이 맛난 음식을 생산(?)한다.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부부의 따뜻한 심성 덕분에 찹쌀과 녹두를 가득 품고 부추를 고명으로 얹은 특별한 삼계탕과, 1~2년 잘 삭힌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의 조합은 지금도 혀끝을 맴돌며 침샘을 자극한다.
같은 요리라도 소스를 잘 이용해 색다른 맛을 창조하고 재료의 덕성을 잘 살리는데 고구마의 여러 가지 변형은 같은 주부로서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여름의 보양식으로 찹쌀과 한약재를 넣은 삼계탕을 자주 한다. 닭과 찹쌀의 조합으로 40여 년 동안 습관처럼 똑같이 끓여냈는데 거기에 녹두를 섞어보라고 그녀가 조언했다. 독소를 제거하고 소화를 도우며 맛이 훨씬 고소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 집 삼계탕의 새로운 룰이 되었다. 아플 때나 별미로 먹는 ‘죽’에서 힌트를 얻어 ‘탕’에 접목한 것으로 요리의 개발자 경지에 오른 것 같다.
나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해마다 국제우편으로 몇 박스씩 받았는데 팬더믹으로 유통이 어려워 마지막 곤드레 나물밥이 될 것 같다며 소박한 미소를 짓는 그녀, 조금밖에 없는 귀한 재료를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마음씨, 아침 6시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태엽 감긴 기계처럼 쉴 새 없이 일하다 보면 그녀도 사람인지라 때론 지치고 귀찮기도 하겠지만, 막 말문 트인 재롱둥이 손주의 응석 섞인 “할머니! 된장국 먹고 싶어요.” 그 말 한마디가 기특하고 고마워 오늘도 그녀는 앞치마를 벗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