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지와 무기력에 혐오를 느끼는 분들께*
기분의 오르내림이 예전 같지 않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장점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껄끄럽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던 기분 따위에 적응했더니, 겨우겨우 일궈낸 적응을 비웃듯이 더는 그러지 않게 됐으니까. 또 하나 추가된 예전 같지 않은 일면이 마냥 껄끄럽기만 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닌데_
아무래도 역시 좀 그렇긴 하지.
곧 마주할 내일과 내일의 내일, 또 다른 내일에도 이러할 거라는 나지막한 믿음이 보기 좋게 무너졌으니까. 나름의 장점이 될 변화에도,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듯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 같지.
겨우겨우 일궈낸 적응과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믿음의 단점이었다.
배반되는 상황에 놓일 때라면 그 방향이 해롭든 이롭든 간에, 어쨌든 껄끄러워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런 거란 식으로 웃으며 넘어가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단 건 아닌데_ 아무래도 역시 좀 그렇지. 오늘에 머물고 있는 내게 예전 같지 않은 일면이 추가되면 껄끄럽다.
지금의 나는 아주 불쾌한 건 아니지만 반대로 썩 유쾌하지도 않은 상태다. 기분의 오르내림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이겠지. 이건 이것 나름대로 장점이 될 순 있을 거다. 하지만 이미 다 무너져버린 적응이나 믿음은 복구될 리 없겠지. 바라던 대로 됐지만 그만큼 잃어야만 하는 게 있었다. 문득 물물교환이란 네 글자가 떠올랐고 그럭저럭 싸게 먹혔다고 안도했다.
그럼에도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더는 예전 같지 않은 기분의 오르내림. 아무래도 나는 여기서부터 다시 일궈내야만 할 적응과,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될 믿음이 꽤나 귀찮아진 것 같다.
오른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진 시야는 똑바로 서지 못한 것들에 친밀함을 느낀다. 어쩌면 초면인 것들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이유가 돼,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이 반가워하지.
마감이 어리숙해 기울어진 보도블록,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골반이 비틀릴 거 같은 오래된 벤치. 언밸런스함을 노렸다는 건축물의 기울기까지,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이 반가워 썩 유쾌한 기분을 한껏 체감한다. 몇 주째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울적한 하늘을 보다가, 대각으로 죽죽 그어진 전깃줄의 존재를 깨단할 즈음. 건물과 건물의 사이가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게, 저 하늘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닫는다.
나 어렸을 적엔 논밭과 논밭 사이에서 봤던 게 저 하늘이었을진대_ 어느새 나는 시골의 일상을 까먹은 애늙은이가 됐지. 나 이렇게 커버린 만큼 몹시도 난해한 세상이 됐다는 사실에, 당신이 꾸던 거꾸로 선 꿈의 의미를 이해했다. 진창을 그리워했던 당신의 마음이 꼭 나의 마음 같아 내년에도 나는:
그곳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저 불길한 예감, 딱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끝끝내 실행될 예언일 거다. 불길한 예감의 적중률은 81%였다. 반대의 확률 19%도 꽤 높은 수치라는 반론을 만지작거렸다. 개소리에 가까운 반론이었다. 보다 작은 수가 큰 수를 이길지도 모른다니,
희소하다면 나사 빠진 듯이
매달리는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똑바로 서지 못한 것들이라면 친밀함을 느끼는 시야로 휙휙 주변을 둘러본다. 마감이 어리숙해 기울어진 보도블록,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골반이 비틀릴 거 같은 오래된 벤치. 언밸런스함을 노렸다는 갸우뚱한 건축물, 흐린 하늘까지 조각내는 전깃줄을 바라보다가 돌아가야만 할 때를 가늠했다.
언제쯤이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해오긴 했지만, 세상의 일이란 게 언제 그렇게 간편했던 적이 있었나. 가능성에 대해 왈가왈부해야 되는 일엔 그저 가늠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만 꼭 헤매듯이 걷는 길의 중간 즈음. 흐린 하늘에 검정이 점점 스며들고 있는 지금은: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사실 그런 시간 따윈 존재한 적도 없었지만, 가설과 가정假定은 믿음을 거름으로 주면 무럭무럭 자랐다. 이게 바로 흔하디 흔한 ‘사회적’이라는 말의 본질이었다. 덧붙여 그 본질이 당신과 나 사이에 머무는 평균이었고, 나는 애석케도 평균이 아닌 게 좋았다.
희소하다면 나사 빠진 듯이
매달리는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평균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요즘이라고 여긴다. 내가 이해한 이게 과연 오해가 아닌 이해가 될 수 있겠는지. 자신만만하게 확신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그런 요즘이다. 평균이란 단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적절함이 더는 낯설지 않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된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토록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슬금슬금 알게 되는 것과 같으리라. 그러고 보면 이해라는 것이 그랬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깨닫게 되는 것보다 서서히 녹아들듯이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언어의 처음이 그러했고 불가능한 임무처럼 여겨지던 삶이 그러했다. 물론 삶은 아직까지도 난해한 부분이 더 많은데_ 어릴 적에 가늠했던 그것과는 꽤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을 머금게 됐으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이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만일에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하여튼 이렇게 여기고 있는 요즘이다.
평균이 담지하고 있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요즘이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줄 알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던 거겠지. 평균이란 단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적절함이 더는 낯설지가 않다.
평등한 시간 아래 머무는 이상
마냥 아이처럼 머물기란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던 듯하다.
사실 평등한 시간 따윈 존재한 적도 없었겠지만, 가설과 가정假定은 믿음을 거름으로 주면 무럭무럭 자랐다. 이게 바로 흔하디 흔한 ‘사회적’이라는 말의 본질이었다. 덧붙여 그 본질이 당신과 나 사이에 머무는 평균이었고, 나는 애석케도 평균이 아닌 게 좋았다.
희소하다면 나사 빠진 듯이 매달리는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언어의 처음과 삶이 가리키는 게 평균이란 것을 이해했을 즈음, 나는 부디 이런 이해가 오해이길 바랐다. 손톱만치도 성장하지 못한 나만의 편협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_ 주변을 둘러보면 똑바로 서지 못한 꿈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들이 나를 빼닮은 걸까, 내가 결국 그것들을 닮아버린 걸까. 평균을 빌미로 친밀해지려 하는 세상에서 멀어지려 애썼고, 애석케도 내 노력의 결말은 평범했다. 전체의 대부분이 겪는 실패에 귀속된 나는 희소한 것에 매달리는 평균이었다.
덕분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평균이란 단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적절함이 더는 낯설지가 않다.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지만 애도할 시간이 주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나 이렇게 커버린 만큼 몹시도 난해한 세상이 됐다는 사실에, 당신이 꾸던 거꾸로 선 꿈의* 의미를 이해했다.
_2025.10.17作
*진이정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