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알 수 있는 걸까.
내어줄 게 마땅찮은 일상은 여백이 넓었다.
이런 것과 저런 것을 거듭하며 이것저것 채워내려 애쓰지만, 밑이 다 깨져있는 독 같은 일상이라 그럴까. 할당량을 마치고 오늘을 둘러보면 휑한 풍경만이 내 주위를 공전하고 있었다. 내어줄 게 마땅찮기만 했던 일상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내 노력의 여부와 빈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런 풍경이었다.
장소를 몇 번쯤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덕분에 내가 바라보고 체감하는 풍경이란 게, 반드시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사실을 이제는 잘 알게 됐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버린 골목에서나 인파로 얼룩덜룩한 공간에서조차 매번 그랬다. 내어줄 게 마땅찮은 나의 일상은 여백이 넓었다.
이런 것과 저런 것을 거듭하며 이것저것 채워내려 애썼지만, 밑이 다 깨져있는 독 같은 일상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서일까. 의미보다는 ‘필요’라는 효용에 꽉 묶인 낱말로 정의될 오늘을 둘러보면 늘 휑했다.
공간의 분위기라든가 존재 따위에 하등 연연치 않는, 휑한 풍경만이 내 주변을 어김없이 공전하고 있었지. 장소를 몇 번쯤 바꾸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채워내려 애썼던 내 노력의 여부와 빈도 따윈, 내어줄 게 마땅찮은 일상에 반영되는 사항이 아녔던 것도 같지. 덕분에 내가 바라보고 체감하는 풍경이란 게, 반드시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란 사실을 이제는 잘 알게 됐다.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버린 골목에서나 인파로 얼룩덜룩한 공간에서조차 매번 그랬다. 내어줄 게 마땅찮은 나의 일상은 여백이 넓었다.
나를 찾는 전화를 받고서 제법 들뜬 마음으로 바깥을 걸었고, 언제든지 반가울 당신을 만나 그럭저럭 재밌는 이야기에 웃음도 지었고, 이럭저럭 만족스러운 한 끼를 함께했고, 혼자 밟는 귀갓길이 그리 고되지도 않았고, 천장에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대며 오늘의 갈래를 나누자면 좋았다는 말을 덧붙여도 괜찮을 텐데_ 공간의 분위기라든가 존재 따위에 하등 연연치 않는, 휑한 풍경만이 내 주변을 어김없이 공전하고 있었지.
‘필요’라는 효용에 꽉 묶인 낱말로 정의될 오늘을 둘러보면 늘 휑하기만 했다. 채워내려 애썼던 내 노력의 여부와 빈도 따윈, 내어줄 게 마땅찮은 일상에 반영되는 사항이 아녔던 것도 같지.
새로 주문한 원두의 포장을 뜯는다. 일주일 정도의 분량을 소분하고선 뜯었던 포장을 둘둘 말아 집게를 물린다. 바로 냉장고에 집어넣으려다 멈추고, 딱히 확인할 필요도 없을 유통기한을 확인해 봤다.
하단에 자그맣게 2027년 2월 14일까지라고 적혀있는데_ 나는 안다. 이번 달이면 남김없이 해치울 테고 다음 달, 1일이나 이번 달의 말일이면 새로이 주문하고 있겠지. 일종의 버릇이었다.
딱히 확인할 게 아니면서도 굳이 확인해 보고서야 안심하는 버릇. 나무색 종이봉투에 넣어 투고까지 마친 탓에 더 이상, 퇴고할 수도 없는 원고를 몇 번씩 흘겨보는 버릇과 같은 거지. 이런 버릇을 두고서 세상은 ‘강박증’이라고 부를 텐데, 내 기준에서 강박증은 이것보다 조금 더 지저분한 버릇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을 유통기한도 확인한 나머지 원두는 냉장고의 맨 아래, 따로 마련된 칸에 집어넣고 냉장고의 문을 닫는다. 원래의 쓰임대로라면 그 칸은 야채나 과일 따위를 넣어두는 곳이겠지만, 필요할 때만 겨우 사 오는 정도라서 언제부턴가 저렴한 원두의 차지가 돼버렸지. 썩 좋은 보관 방법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공간이 마땅찮은 집구석에다 ‘가성비’라는 변명을 마련해본다.
2잔에서 3잔쯤 나올 분량의 원두를 갈았다.
누군가와 함께 마시기 위한 건 아니고, 작업하는 내내 마실 예정이라 늘 이만큼 내린다. 1kg씩이나 주문한 원두가 한 달이면 동이 나버리는 이유다. 말하자면 하루를 책임질 만큼의 커피를 한 번에 내려버리는 거지. 때문에 혼자 마시는 커피의 맛은 늘 오락가락한다.
원두 양을 조절할 때를 제외하면
모든 동작을 대충해버리니까,
맛이라는 게 일정할 수가 없겠지.
커피의 재밌는 점이 있다면 맛을 좌지우지하는 것에 원두의 양도 어느 정도는 중요하겠지마는: 그 이후에 이어질 ‘분쇄’와 ‘추출’에서 맛의 대부분이 판가름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중요한 과정을 건성으로 한다. 타인을 위해 내릴 때는 몇 번씩 확인을 거듭하고, 한 번의 동작마저도 몇 번씩이나 끊어서 하는데_ 나를 위해서 내릴 때는 각기 다른 동작들이 하나로 이어져있는 수준이지. 좋게 말하면 능숙하게 빨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봐도 나는 커피를 너무 대충 내린다.
언젠가 SNS에다 커피 내리는 걸 영상으로 찍어 공유했더니, 커피를 잘 아는 누군가가 댓글로 그게 뭐냐면서 핀잔을 주더라고. 그때 이후로 나를 위한 커피는 나만의 비밀이 됐다.
요즘에는 커피를 좋아하냐는 말에
입을 다물어버리기도 한다.
좋아한다고 자부할 만큼 잘 아는 것도 아니거니와 어디까지나 출처가 불분명한 버릇만 같이 여겨지니까. 어느 즈음부터 커피는 나만 아는 비밀이 됐다.
취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란 사람이 난해하게만 보이곤 한다. 책에서 시작해서 음악과 영화, 입맛에서 나아가 내 취향에 들어맞는 공간 또는 옷. 이런 것들을 머릿속으로 줄줄이 나열하며 내 취향을 ‘적당한’ 낱말로 정리하려 들 때마다 그런다.
간단하게 음악에 대한 취향만 다뤄도
도대체 이게 뭐지,
싶은 감상이 떠올라버리지.
서정적인 발라드나 인디 뮤지션의 나긋나긋한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더니, 이어서 듣는 노래가 잔뜩 화난 목소리로 요란하게 노래하는 펑크 록(Punk Rock)일 때가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운율과 리듬을 만들어내는 힙합이나 레게를 듣고 있을 때도 있었다. 어떤 날에는 괜히 어렸을 적에 선망했던 아이돌들이 떠올라서 아이돌들의 댄스곡을 종일 듣고 있기도 한다.
이런 탓에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선호와 우선이 바뀌는 거라고 정리할까 싶으면, 그런 기분 안에서도 나름의 이유는 분명하게 있기 마련이었다.
확실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아티스트도 있었고, 도대체가 기준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싶은 플레이리스트를 쭉 듣다보면, 의외로 이어지는 ‘결’이 존재했다. 장르와 주제 이어서 아티스트도 다르지만, 알게 모르게 같은 결이 느껴지긴 했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 ‘결’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고 있단 사실이었다. 이것만 좀 가닥이 잡힌다면 “나는 이러이러한 취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_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가닥이 쉽게 잡히진 않는다.
덕분에 취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란 사람이 난해하게만 보이곤 한다. 내가 좋아했던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줄줄이 나열하면서, 내 취향을 ‘적당한’ 낱말로 정리하려 들 때마다 그런다.
어쩌면 틈이 날 때마다 끈질기게 붙잡고 생각해야 될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 알 수 있는 걸까. 역시나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저 지금은 이끌리는 그대로
흘러가보는 게
최선이겠다는 생각만 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