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서나 '좆소'는 '좆소'이고 개 같은 상사는 개 같다.
석사 졸업 후 짧은 공백기를 불안으로 서성이며 견뎠다. 두 달 뒤 취업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저주의 시작이었다.
나는 지난 한 달간 아주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으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시작은 매니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평소와는 다르지만 중요한 이야기야.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우리 팀에 구조조정이 있었어."
이미 오전에 같은 팀에서 일하는 나의 파트너가 매니저와 통화를 한 뒤라서 대충 짐작은 했다. 저 다음 말은 뭘까, 나는 잘리는 건가. 죽어도 하기 싫은 기존 업무로 돌아가라고 말하면 어쩌지. 다른 회사에 취업은 할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중에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우리 팀 수습사원들 중 누구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을 거고, 더 이상 새로운 직원도 뽑지 않을 거래. 앞으로 모든 우리 팀 업무는 홍콩 팀에서 전담하게 될 거고 우리 팀은 그 일부 업무만 나눠서 맡아하게 될 거야. 그만두는 직원이 있어도 충원은 하지 않는대. 그냥, 우리 팀이 알아서 소멸하길 원하는 것 같아. 내가 받은 메일에 너한테는 디렉터가 직접 연락할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혹시라도 디렉터가 연락하면 너무 놀라지 말라고."
그 짧은 몇 마디로 내 파트너는 약속된 승진을 박탈당했고 나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나와 내 파트너, 그리고 우리 팀 대다수는 우스개 소리로 우리가 사기취업을 당한 거라 했다. 분명 'Researcher'라는 그럴듯한 직함을 달고 연구업무를 담당하게 될 날만 기다렸다. 연구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역량도 덤으로 챙겨갈 수 있으리라고, 조건이 더 좋은 회사로 옮겨가려면 이만한 자리도 없었다. 여섯 달이라는 수습기간 동안 Zero Hour Contract에 묶여 2주에 한 번씩 주급을 받는 불안정한 살림살이가 이어졌다. 우리는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그 모든 인간 이하의 취급을 감수했다.
취업 뒤 마주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우리가 하는 일은 연구 참여자를 모집하는 리쿠르팅 업무였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링크드인으로 연구에 참여할 만한 사람들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내고 대뜸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들의 무례한 태도를 모두 감당하면서도 직장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며 버텼다.
회사는 우리 팀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내는 부서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칭찬만 했다. 2년 동안, 연봉협상 기회는 없었다. 남의 회사는 성과가 없어도 성과급이 나온다던데 회사의 보배라는 우리는 성과급의 '성'자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물가가 10%씩 오르는 살벌한 상황에도 우리는 업계 평균을 한참 밑도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그저 버틸 수밖에 없었다. 박사학위자나 대학 강사마저도 신입 공고에 지원해야 하는 시절에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편이 좋다. 나아질 거라고.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근거 없는 위로를 했다. 나아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라도 그렇게 해보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어쩌다 디렉터 마음에 들어 2년 동안 승진을 세 번 거듭했다. 마지막 승진은 내 비자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없던 자리까지 만들어 시킨 승진이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한 리쿠르팅 업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직접 만든 자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날의 내 뺨을 올려 부치고 싶다. 이 회사에는 회전문 인사만 있을 뿐이라고. 능력 있는 인재가 아니라 디렉터가 제 귀찮은 일 떠넘길 직원만 승진시킬 뿐이라고.
물론 허울뿐인 승진인지라 내 월급은 여전히 업계 평균의 밑바닥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새 자리에 앉아 나는 체계라고는 하나도 없던 팀을 바닥부터 손보기 시작했다.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만들고, 트레이너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채용업무에 배치되고부터는 사기취업이라 여기고 낙담할 사람들을 최대한으로 줄이려 할 수 있는 한 손을 썼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자기가 만든 완벽한 사기의 판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니 디렉터가 나를 아니꼽게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필리핀 팀 채용을 진행하는 나는 이유도 없이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그 뒤로 몇 달 동안 디렉터는 내 연락에 대꾸하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디렉터의 연락을 기다리라는 말을 전달받고 2주가 흘렀다. 여전히 누구도 내게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는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알음알음 내가 받는 불이익을 테두리를 더듬어 볼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불쾌하고 끔찍한 건 이 두 가지였다.
1.
차후 내 업무를 넘겨받기 위해 내게 트레이닝을 받고 있던 홍콩팀 입사 두 달 차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가 내게 대뜸 내가 트레이닝을 진행하던 신입 직원들을 넘겨달라 한다. 황당한 마음을 다잡고 홍콩팀 매니저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디렉터와 새내기, 본인 세 사람 사이에 이미 논의가 끝난 일이라고 한다. 내가 관련된 일인데 왜 나는 논의에서 제외됐느냐 물으니 본인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2.
제 스스로 제 업무도 감당하지 못해 계속 내게 도움을 청하던 홍콩 새내기가 예정된 미팅에 10분가량 늦었다.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이 "요즘 면접 잡힌 일이 많아서 조금 바빠요."라고 말한다. 면접이라면 내 업무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홍콩팀 매니저를 찾는다. 입사 두 달 차, 다른 회사 근무 경력이 없는 새내기가 신입 사원 면접에서 면접을 진행한다고 한다.
내가 여태껏 일궈온 모든 것이 이렇게나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회사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 내가 일군 모든 것을 눈 뜨고 코 베이듯 빼앗기면서도 그저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무너져 내린다.
3주 차가 되었을 때, 초상집 분위기인 팀원들을 위해 회식을 계획했다. 오랜만에 사무실로 출근한 내게 무언가 들은 바가 있던 L&D 매니저는 다가와 말을 건다.
"난 이 결정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가... 홍콩팀이 대단히 잘하고 있으면 모르겠는데, 거기 이직률도 너무 높고, 네가 하는 일 대신 할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튼 내가 어제 사장이랑 회의하다가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누구라도 빨리 연락해 주라고 했어. 스스로 잘 살펴. 알았지?"
맥락이 없는 위로는 되려 불안을 키운다.
속절없이 4주가 흘렀고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참다못해 결국 사장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우린 너희 팀에 구조조정을 한 적이 없어. "Zero Hour Contract로 일하던 사람들 중 누구도 잘린 사람은 없고 이제껏 해오던 대로 주단위로 나오는 스케줄에 따라 일할 거야. 런던팀 채용을 할 계획은 당분간 없어서 너도 채용업무를 따로 할 일은 없을 거고, 이 메일에 네 디렉터도 수신인으로 걸어둘 테니까 네 직무관련된 내용은 디렉터한테 직접 들으면 될 것 같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팀의 절반이 약속된 계약 전환을 받지 못해 모두 제 나라로 쫓기듯 돌아가야 할 상황에 놓였다. 쥐꼬리 만한 연봉이라도 올려받자고 쥐어짜며 최선을 다하던 승진 예정자들은 승진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나마 승진이라도 해야 다른 회사에 주니어 직급으로 기웃거려보기라도 할 경력을 만들 수 있는 형편없는 회사에서. 뻔뻔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고 실감한다.
무려 사장이 보낸 메일에도 내 디렉터는 감감무소식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다시 2주가량이 흘러 무려 처음 소식을 접한 지 두 달이 다 된 오늘에서야 나는 비로소, 그 거지 같고 치사한 내 직무의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제가 저지른 일을 제 손으로 수습할 일말의 책임감도 없는 디렉터는 또다시 매니저 뒤로 숨었다.
"오늘 디렉터랑 사장이랑 회의를 했는데, 네 직무에 관한 얘기가 나왔어. 사장이 지금 네가 하는 데이터 관리일만으로는 아무래도 내가 일이 너무 없는 게 탐탁지 않은 것 같아.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디렉터한테 아시아팀 채용업무를 네가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니까 단번에 싫다고 하더라."
"난 이해가 안 가. 대체 뭐가 문제라서 상황 설명을 해주지 않는 거야? 애초에 아시아팀 채용업무도 내가 시켜달라고 해서 시작했던 게 아니라 본인이 나한테 하라고 넘겨주고는 대뜸 나를 업무에서 배제하더니 입사한 지 두 달이 갓 지난 애한테 내 업무를 넘겨주고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 줄 책임감도 없는 거야?"
"그러게, 아무튼 그래서 너한테 기존에 하던 리쿠르팅 업무를 다시 하라더라고... 네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면 사장이 너랑 직접 얘기할 의사가 있대."
"뭐 언제는 아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 내린 것처럼 구네. 이미 결정은 자기들끼리 다 내렸고, 바꿀 마음도 없으면서 대화는 무슨 대화야. 시키는 대로 하라는 얘기 하냐. 그래서 언제부터 그 좆같은 리쿠르팅은 다시 시작하면 되니?"
돌고 돌아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뭐 하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회사에서. 상식을 바라는 게 비정상이라는 걸 알고 그저 탈주할 그날 만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