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5년, 우울이 왔다.

영국 생활 5년 차 직장인, 의사는 내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by Biiin

이방인 5년, 우울이 왔다.

"세상은 참 단단히도 잘못됐지?"

모로코의 수도 마라케시에 있었다. 낯선 땅. 아득히 멀기만 하던 아프리카에서도 눈에는 자꾸만 못나고 슬픈 단상이 담겼다. 현관 밖을 나가면 어디든 고단하고 지친 슬픈 풍경이 있다.

영국에 사는 누구나 여름의 끝물이 일렁이기 시작하면 SAD(Seanoal Affective Disorder), 이름도 절묘한 불청객과 눈치싸움을 시작한다. 낮과 밤의 경계가 흐릿한 긴 겨울을 보내다 보면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가 결국 마음에도 깃든다. 작년의 기억이 쌓여 올해의 일상에 밑그림을 그리고, 올해의 그림이 내년의 조감도를 설계한다. 한해, 한해, 우중충한 날들을 흘려보낸 무료한 기억이 쌓이면 계절이 바뀔 조짐이 조금만 보여도 덜컥 겁이 난다. 이 긴 겨울을 또 어찌 보내나. 흐릿하고 탁한 마음에 먹구름 같은 잡념이 뭉게뭉게 차오른다. 누군가는 이런 계절이 자신의 "무드"에 꼭 맞아서 자신은 런던이 체질이라고 말한다. 런던이 체질이라는 말도 기괴하지만 이 계절을 평생토록 누리며 살아도 좋다는 섣부른 말은 넣어두는 게 좋다. 일 년 중 절반에 가까운 계절이 침울한데 침울한 게 본인의 "무드"에 맞다면 아마도 그건 만성우울증일 확률이 더 높다.


작년에는 스멀스멀 겨울이 올 것 같을 때 한국에 있었다. 이런저런 골칫거리를 해결하다 더 이상 힘을 내고 싶지 않아 진 순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엄마 집에서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가끔 사람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 산속에 들어가 마냥 걷고, 우연히 지나던 절에 들러 초를 밝혔다. 이윤이란 걸 남길 줄 모르는 작은 식당에 들어가 맛깔나게 요리된 푸성귀로 배를 채웠다. 가만히 널브러져 있으면 다들 고생했다고, 야위었다고 나를 다독였다. 하늘이 높고 파래서, 매일같이 해가 떠오를 걸 알아서, 별달리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다 잘했다고 말해줘서 다시 쏟아부을 힘을 채워서 런던에 돌아왔다.


세상은 워낙 제멋대로 돌아가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에 채워온 힘은 금방 또 고갈됐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더 큰 문제가 터졌다. 따뜻한 계절은 다 흘러 다시 긴긴 잿빛 겨울이 왔다. 시의적절하게 지난여름 예약해 둔 모로코 휴가 일정이 다가왔다. 마침 회사에서도 황당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고래싸움에 등 터진 새우꼴이 된 지 오래였는데,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고 싶었다.

쨍한 색채와 시원하게 뻗어 오른 야자나무, 아침을 여는 아잔(Adhan). 모든 게 어우러져 모로코는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사막의 쏟아지는 별을 보다가, 여울 치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다가, 혼돈의 시장 골목에서 웃으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호의에 잠시 코끝이 시큰할 때도. 머릿속은 잠잠해지고 마음은 고요해졌다. 우습게도 그 자리를 비집고 눈물이 차올랐다. 도대체 뭐가 그리 서러운지 말도 하지 못하면서. 내가 서러운 것을 타인에 투영하는지 남들의 설움이 내 것과 닮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짐수레를 날라주던 무하마드의 거친 발뒤꿈치가, 씩 웃는 미소에 깊게 주름이 지던 버스기사 무스타파의 눈빛이, 이도 저도 아닌 외딴 사막 한가운데 모인 중산층 백인 휴양객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열심히도 쟁반을 나르고 박수를 치던 호텔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적막한 사막을 애처롭게 적시는 베르베르 사내의 노래가 한 데 뭉뚱그려져 나는 또 울적해지고 만다.


여행을 준비하며 친구에게 "나는 힘든 여행은 하고 싶지 않으니 많이 걷고 헤매야 하는 일정은 피하자, "고 못을 박았다. 내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며 번 돈으로 산 나의 편의는 누군가의 밤낮 없는 노고 없이는 불가능한 선택지라서 나는 춤을 추면서도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세상은 참 단단히도 잘못됐구나, " 생각하면 수도꼭지도 없는 눈물샘은 주책없이 눈물을 잘도 뽑아냈다. 내 계절성 우울증 도피 휴가는 그렇게 좋다가 슬프다가 행복하다가 서럽기를 널을 뛰다 끝이 났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오후 세시도 채 되지 않은 런던은 아니나 다를까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처럼 비도 추적추적 내렸다. 창 밖으로 익숙한 날씨가 눈에 들자마자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좋든 싫든 영국은 어느새 두 번째 집이 되어버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잡아둔 GP 예약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최근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 동생은 내게 내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증상이 만성우울증인 것 같으니 너무 힘들면 정신과를 찾아보라 했다. 매일같이 나를 지켜보는 파트너도 네가 힘들면 의학적인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는 말을 계속해오던 참이었다. 나는 의사를 만나도 할 말이 별로 없는데 하면서도 다들 저러는데 속는 셈 치고 한번 가보자는 마음으로 가장 빠른 일자 예약을 걸어두었다.


종종 울컥하긴 했어도 여행을 다녀온 뒤 훨씬 홀가분한 마음이었던 터라 굳이 병원에 가야 할까 싶은 마음이 일었다. 휴가 후 회사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이번 비자가 만료되면 회사가 더 이상 내 비자를 지원할 계획이 없다"는 연락이었는데도 걱정보다는 해방감이 앞섰다. "개 같은 회사 차라리 잘됐다." 똥 묻은 개가 알아서 비켜준다니 오히려 고마웠다. 휴가 한 번에 사람이 이렇게나 너그러워졌는데 병원에 꼭 가야 할까. 가장 빠른 예약을 잡은 게 무려 3주나 걸렸으니 아까워서라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병원에 도착해 리셉션에서 안내를 받고는 대기실에 앉았다. 세상엔 참 아픈 사람도 많다. 한참을 기다려 담당 의사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본인 진료실로 나를 안내했다. 의자에 멀뚱히 앉아있는 나를 본 의사 선생님이 말해보라는 듯 내게 두 손을 내밀었다. 그 두 손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터졌다. 언젠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정신과 상담을 예약하고 덤덤하게 화장도 하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는데 의사가 "뭐가 힘들어서 오셨냐"는 말을 꺼내자마자 눈물이 터져서 멈출 수 없었다고. 오, 내가 똑같은 경우라니.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티슈 상자를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Take your time." 이 말은 언제나 위로가 된다. 이 시간, 이 공간의 중심은 너에게 있으니 스스로 재촉하지 말라는 말. 호흡을 정리하고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말하지 않고 쌓아온 것들이 너무 많아서 두서없는 덩어리가 대책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참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내게 대화하는 중 우울증으로 보이는 증상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내가 최악의 상황과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먼저 그리는 뇌를 타고난 이유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야기하는 속에서 내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인 걸 알게 됐으니 그 강점을 잘 활용해 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주 평온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선한 사람, 부조리를 겪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세상은 공평하게 대하질 않아요. 만약 당신이 카르마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건 그대로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원인과 결과에 귀속된 삶을 살지 않죠. 당신은 부정적인 상황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되 항상 최선의 상황을 바라보세요."


의사가운이 뭐길래. 매일 듣는 말에 더 큰 힘이 실렸다. 선생님은 내게 "오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라며 첫 상담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시작부터 약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숙제를 내줄 테니 집에 가서 숙제 먼저 해보라고 했다. 첫 번째는 상담치료를 연결해 줄 테니 집에 돌아가 상담치료를 예약할 것. 두 번째는 항우울제에 대해 스스로도 더 공부해 볼 것. 숙제를 모두 마치면 크리스마스 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때 또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다시 돌아와서 또 얘기하라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숙제는 빠뜨릴 수 없는 샌님인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진료실에서 받은 상담치료 팸플릿에 있는 웹사이트로 들어가 상담치료를 예약했다. 이걸 해야만 상담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첫 상담치료가 예약됐다는 메일이 왔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사람들이 자칫 허튼 생각을 품을까 봐 분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나는 그게 또 고마워서 코끝이 매웠다.


5년 넘는 시간을 이민자로 살며 어떤 때는 날카롭게 찌르고 어느 날은 더 선명하게 내 몸 위를 가로지르는 국경을 버틴 결과가 우울증이라니. 내게 깊은 시름과 끝도 없는 우울을 주는 나라를 집이라 부르며, 무엇을 어떻게 쌓아가야 할까. 세상이 호되게 몰아쳐도 그 안에 서로 기대고 사는 이들은 또 어떻게 내 손을 잡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나. 2025년 11월 27일, 길고 긴 내 우울에 드디어 이름이 붙었다.


IMG_4228.jpeg

혹 영국생활 중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지만 마땅히 물어볼 주변인이 없거나 치료과정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 남깁니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면 우선 등록된 GP에 Routine GP Appointment로 예약하세요.

전화예약을 하든 NHS 앱 또는 Patches 앱 등을 통해 예약을 하든 상관없어요! 예약 페이지에 간단한 예약내용을 적는 란이 있으니 본인의 상태를 간략하게 설명해 두고 예약날 GP에 방문하면 됩니다.


GP는 한국의 가정의학과와는 다르게 정신과 진료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정신과 진료 역시 GP 진료로 이뤄집니다. 혹시 정신의학까지 진료를 보지 않는 의사가 있다면 GP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 정신의학을 담당할 수 있는 의사로 예약을 변경해 줄 거예요.


상담치료 역시 NHS 일부로 무료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거주하는 구(borough)에 따라 상담치료 시스템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GP 방문을 우선 추천하지만, 혹시 상담치료만 받고 싶다면 자기 추천으로 상담진료도 예약할 수 있으니 알아보세요! (통역이 필요할 경우 통역사도 제공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참고: https://www.nhs.uk/nhs-services/mental-health-services/find-nhs-talking-therapies-for-anxiety-and-depressio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