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아냐.

영국 NHS 정신과 상담 과정 - 토킹테라피 시작되다.

by Biiin
당신이 우리에게 부담이라 생각지 말아요.

숙제하는 마음으로 상담치료 예약을 잡았다. 숙제를 해야 다음번 진료 때 뭐라도 할 말이 있을 테니까. 불안을 덜라고 받은 숙제였다. 내 불안에 대한 대화를 해야 하는 일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걱정이었고, 한마디 한마디 평가받고 있을 거란 부담이 불안한 마음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기분이 좀 나아졌으니까 다시 좀 버텨봐도 나쁘지 않겠다 싶기도 했다.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또다시 모든 걸 나보고 떠안으라고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취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나 하는 사이 전화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상담센터의 X예요. 약속 시간보다 늦어져서 미안해요."

"아니요,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수화기 너머로 X의 동료들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도 아픈 사람은 많았다. 수화기 너머의 너머, 이름 모를 이들도 도움을 찾고 있는 소리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는 남들보다 많이 일한 사람들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샘이 많은 인간은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본다. 나만 힘들고 남들은 덜 힘들면 두배로 속이 상하는 법이다. 샘이 많은 나는 나만 아프고 남들은 아프지 않아서 더 아팠다. 웅웅 울리는 소음이 들린다. 다들 아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들 아프다. 나와 파트너는 종종 푸념 반 농담 반 이야기했다. 이런 세상에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상담사 X는 오늘 통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결정하기 위한 단계라고 했다. 문답을 시작하기 전 상담사는 내게 어떤 이유로 상담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서질 않았다.


"지지난 주에 GP에 갔었는데요, 선생님이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자마자 눈물이 터져서 한참을 울었어요. 대화를 나눈 뒤에 선생님께서 우울증으로 보이는 분명한 증상들이 있지만 바로 약을 쓰고 싶지는 않다고, 토킹테라피를 받고 다시 보자고 해서 신청하게 됐어요."


의사의 말을 빌려 상담의 문을 열었다. 상담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40분 정도 나눴다. 상담을 마무리하며 X는 오늘 상담내용을 가지고 슈퍼바이저와 논의 후 오후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핸드폰을 내려두고 오래도록 미뤄두었던 세탁기 청소를 했다. 최근 기분이 나아진 시발점이 늘어지는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해낸 욕실청소였던 것 같아서. 잡생각이 끼어들기 전에 세탁조 클리너를 집어 들었다. 몇 달 동안 닦은 적 없는 세탁기 배수필터를 열자 고인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가끔 마음도 밸브를 풀어 고인 물을 싹 덜어내고 다시 끼워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우리를 갈아 끼우면 그만인 건전지처럼 소모하는데 왜 마음은 덜어내고 갈아 끼우면 그만인 소모품일 수가 없을까. 고이고 짓무른 구석만 깔끔하게 도려내 버리고 새것을 끼워 쓸 수 있다면 누구 하나 아프지 않아도 될 텐데. 아픈 이들을 불러들여 오이디푸스신드롬이니, 불안정회피형 애착이 어쩌고, 엄마가 잘못이네 아니네 하며 또 돈을 벌어대는 산업이 탄생하진 않았을 텐데. 아픔이 돈벌이가 되는 세상이라니.


청소를 마치고 2026년 용 데일리플래너를 사러 갔다. 항상 동네 서점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이제 나를 알아보신다. 계산대에 선 내게 오늘은 로열티카드를 챙겨 왔느냐고 물었다. 며칠 전에 샀으면 조금 더 비쌌을 텐데 오늘은 할인가라고 깨알 같은 희소식을 전한다. 항상 우물우물 말하는 할아버지가 있는 서점이라서, 손님이 고르는 책을 보고는 꼭 다정한 안부로 연결하는 따뜻한 마음이 고인 곳이라서, 그곳에서 플래너를 사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유리천장으로 빛이 쏟아져드는 시계탑 카페로 갔다. 카푸치노를 시켜 구석에 자리를 잡고는 책을 읽었다.


I wish to be like the River Thames: I want to tend to what has been discarded, damaged and forgotten.* 버려지고 깨지고 잊힌 것들을 들여다보고 살피는 강 같은 삶.


아침 상담에서 X가 물었다. 거친 시간을 헤쳐가게 하는 건 뭐냐고. 파트너냐고. 가족이냐고. 친구들이냐고. 나는 답했다. 이 시간을 버티면 더 큰 시련이 올 때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라는 믿음이라고. 그런데 그게 다 허깨비였나 보라고 말했다. 의사 앞에 앉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은 걸 보면, 여태껏 묻어두고는 강해졌다고 믿었던가 보다고. 버려지고 깨지고 잊었던 것들을 돌아보라고, 다 품고 고요하게 흐르는 강이 되라고 묻어두었던 파편들이 나를 찌르는 모양이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상담사 X는 내 전화를 다시 울렸다. 논의해 본 결과 내게 6회의 불안 관리 CBT(Cognitive Behavioural Therapy)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상담을 시작할 수 있고, 주 1회 30분씩 진행할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원하면 내 담당 GP에게 상담과 치료 진행상황을 공유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더불어 내 문제의 많은 부분이 직장과 경제적인 상황에서 오는 만큼 취업관리팀에 나를 바로 연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아침 상담에서 나는 비자지원이 필요한 반쪽짜리 신분으로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만큼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비자지원이 필요한 상태인데, 취업지원팀 서비스를 이용해도 괜찮을까요? 만약 취업지원팀에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면 저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은데요."


옅은 웃음을 띤 목소리로 상담사 X가 말했다.


"이 서비스는 도움이 필요한 모두를 위해 열려있는 거니까, 당신이 우리에게 부담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취업지원팀에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준비해 줄 거예요. 당신이 우리 자원을 낭비하는 게 아니에요."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모호한 지점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내가 이 나라에서 이용하는 서비스 중 어디까지가 정당한 내 권리이고 어디부터 그들의 호의 인가 하는 경계가 그중 하나다. 특히 영국처럼 모두가 무료로 의료서비스를 받는 나라에서는 (물론 비자를 신청하며 입이 떡 벌어지는 의료보험료를 선불로 결제하기는 하지만) 무료 사회보장서비스를 받는다는 게 영 마음이 가볍지 않다. 치료를 기다리다 병이 악화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항상 이방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삶을 살다 보면 자국민들도 누리기 힘든 서비스를 내가 가져다 써도 되는 건지 조심스러워진다. 내 우려에 다정한 마침표가 달린다. 너는 짐이 아니라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일인으로 네 건강이 이 사회의 건강이며, 너를 살려야 우리가 함께 산다고.


의료서비스가 국가적 차원에서 제공되니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지원도 함께 솔루션으로 제공된다는 점이 든든하기도 했다. 나는 정신과 상담을 했다. 나머지 문제해결은 모두 나의 몫이라 생각했다. 직업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도와주겠다니. 이 나라가 어떻게든 나를 다시 살려보려나보다. 병 주고 약 주고 이제 또 무엇을 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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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re rivers in the sky>, Elif Shaf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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