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안녕,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편지를 쓴다.
저번 주에는 독일 와서는 거의 잘 가지지 않던 술자리를 이틀 연속이나 가졌어. 술자리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한국처럼 늦게까지 떠들고, 놀고, 술도 마시니까 재미있더라. (아, 물론 나는 아직도 술 잘 못 마셔. 맥주 몇 잔 마셨지만 그래도 술은 술이잖아.)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는 자리도 있었는데, 낯을 좀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지나니까 어색함이 떨쳐지더라.
오랜만에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웃고 떠들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직 이런 자리가 부담스럽긴 마찬가지긴 해도, 금방 적응하는구나 라고.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정말 싫었어. 그때는 길 물어보는 것도 어려워했을 정도였고, 그런 나에게 술자리는, 특히 모르는 사람과의 술자리는 노는 자리가 아니라 '스트레스'였어.
성격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해왔었고, 20살이 되면서 대학교 입학하면서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것 같아.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 교실에 1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수업도 듣고, 밥도 먹고, 축구도 하다 보면 특별히 뭘 안 해도 친구들이 생겼거든. 그런데 대학교에서는 여기저기 강의실도 옮겨 다녀야 하고, 아웃사이더가 되면 진짜 아웃사이더로 지낼 수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조금씩 노력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
말한 것처럼 길 물어보는 것도 어려워했으니까 길이 궁금하지 않아도, 길을 물어보곤 했어. 근데 이때 알았는데,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길을 잘 묻지도 않고 길을 물어보면 사이비 종교 단체인지 의심이 든다더라고. 그래서 그때 길을 물어보면서도, 정말 길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 됐어.
또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도 그렇고, 대학교 강의시간에도 그렇고 궁금한 게 있어서 교수님께 질문을 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 꽂히는 게 너무 무서웠어. 티를 안 내려고 해도,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빨개졌거든. 그런 나에게 발표를 해야 하는 시간은 공포 그 자체였지.
길을 물어보는 사람인 역할을 '연기'한 것처럼, 발표 시간도 연기하듯이 했어. 스크립트를 짜고, 시선을 자연스럽게 옮기는 것도 연습했고, 무엇보다 예상하지 못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 발표 안에서 질문이 나올 수 있는 모든 항목에 대해 준비해야 했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면 모든 '연기'는 무너질 거 같았거든. 그래서 심지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왔을 때, 크게 당황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도 준비해야 했어.
이때 중요한 건, 스크립트를 그 자체로 완전히 외우려 하면, 긴장해서 버벅거리거나, 문장 하나를 잊어버리게 되면 그 발표 전체를 망친다는 거야. 중요한 몇 개의 단어만 꼭 기억해서 비슷한 흐름으로 여러 개의 문장을 만들어 보면서, 흐름을 망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이렇게까지 해서 도움이 되었냐고 하면, 졸업할 때쯤에는 오히려 발표시간이 제일 자신 있었던 것 같아. 동아리 회장을 맡아서, 전국 대회에서 PPT를 하기도 했고말이야. 물론 그때까지의 많은 연습과, 실전 경험 덕분이겠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도, 발표하듯이 준비를 했었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기는 얘기긴 하지만 소개팅 자리에 갈 때 밥을 먹으면서, 밥을 먹고 나서 얘기해야 할 주제나, 멘트들을 생각해서 머릿속으로 상황극처럼 짰던 것 같아. (물론, 이건 발표랑 달라서 내가 준비한다고 해서 상대 반응까지는 준비가 안되더라. 그래서 망했지 뭐.)
시간이 지나서 지금이야 사람들을 만날 때, 상대를 살피고 반응도 읽을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말하는 것보다는 잘 듣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서 대화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됐지.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좌절도 있었고,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한 마음도 있었어.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의 실무자 면접 중에 자소서에 써져있는 성격을 바꿨다는 얘기에, 면접관 분이 물어보셨었어. 근데 그게 실제로 가능한 거냐고. 나는 그때 말씀드렸어.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바꾸는 건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보는 제 성격을 바꾸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다른 성격의 껍데기를 하나 만들어서 덧붙이는 것처럼요.'
면접관 두 분은 그 대답을 곱씹으시면서, 납득을 하시더니 칭찬하시더라.
나는 지금도 예민하고, 소심하고, 내성적이야. 이제 이건 바꾸고 싶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도,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도 나를 보고 내향적인 사람이라거나, 소심한 사람으로 보지 않더라.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내 혈액형을 얘기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이 예상하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지금은 맞추는 경우도 없고, 알게 되면 놀라기도 해.
이제는 내향적인 성격보다 외향적인 성격이 좋다고만 생각했고, 성격을 바꿔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옳은 생각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대하면서 지금은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 연기했던 캐릭터 자체가 나한테 녹아들었다고 생각하고, 그게 내 삶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성격을 바꾸고 싶겠지만, 그건 사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네가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연습을 통해서 어느 정도 커버는 가능한 것 같아.
노력으로 모든 걸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더라.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