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상자, 썸, 그리고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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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 mark



나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을 사는 걸 좋아하는 맥시멀 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집에 들여놓고는 먼지만 쌓여가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긴 해. 얼마 전에도 그런 '취급'을 받을 뻔했던 물건이 있었어.


블랙 프라이데이 딜을 시작하기 전부터, '얼리 블랙프라이 데이'와 같은 이름들로 온라인에서는 이런저런 물건을 벌써 싸게 내놓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내 눈에 뜨인 건 우유 거품기였어. 커피를 내리고, 우유 거품기에 우유를 따라내고 전원을 켜면 윙윙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적당한 온도로 따뜻해지면서 폭신하고 몽근하게 거품이 올라오는 거야. 물론 날이 더울 때는 차가운 우유에 풍부하게 거품을 내서, 시원한 아이스 카푸치노도 가능하지.

코로나로 인해 독일은 '라이트 락다운'이 시작되었고, 게다가 날도 추워져 더 이상 카페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할 수도 없으니 홈 카페 이용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어.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마치 밖에서 사 먹는 것 같은 플랫 화이트, 카푸치노, 카페라떼 한 잔의 여유라니. 내게 꼭 필요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면서, 세일까지 하니 이건 사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인 것처럼 느껴졌어.


결론적으로 장바구니에 넣어놨던 그 우유 거품기는 삭제해버렸어.

첫째로 그 '여유'는 일주일 중 주말, 그것도 아침에 한잔 마시는 게 다였어. 주중 아침에는 출근길에 커피 한잔을 사 마실 수 있는 여유도 없는 경우도 많은데 그냥 커피 내려마시는 것도 아닌, 라떼라니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여유, 즉 사치였지.

두 번째로는 내가 우유가 들어간 라떼류의 커피를 그렇게까지 즐겨 마시지는 않아.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자주 마시는데, 생각해보면 주말 아침에 한두 잔 정도가 다 더라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집에 이미 핸디형 우유 거품기가 있었어. 우유 거품기 성능이 좋지 않아서 풍부한 거품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매번 사 마시던 우유가 1.5%의 저지방 우유였고 거품을 내고 싶다면 3.5% 지방의 우유를 사면 되더라. 주전자 모양처럼 생긴 저그(Jug) 컵에 그 우유를 따라서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아주 저렴하게 산 막대기같이 생긴 우유 거품기를 위아래로 넣었다 뺐다 하니까 내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거품이 잘 나더라.

그래서 사지 않았어. '꼭' 필요한 건 아니더라고.


만약에 이런저런 생각하지 않고 샀다면 그 거품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매하기 전, 아니 물건을 받고 나서도 처음에는 어떻게든지 써보고자 라떼도 자주 마시고 이것저것 새로운 레시피도 찾아보고 했겠지. 그런데 거품기의 카테고리가 '새 물건'에서 '살림살이'로 카테고리가 바뀔 때 즈음 거품보다 더 폭신하고 소복하게 먼지가 쌓여있을지도 몰라.




이런 거품기 이야기에서 연애 이야기로 주제를 옮겨가려니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나는 연애에 있어 일반적으로 말하는 '썸'의 단계가 물건을 받기 전까지의 단계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어.


아는 사람 중에는 '연애는 하기 싫고 그냥 계속 썸만 탔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있었어.

'내 사람'이 되기 전까지의 그 설렘, 아직 좋아하는 감정만 있기에 단점이 보이지도, 아니 단점을 봐야 할 필요가 없는, 아직은 둘이 보내는 시간보다는 둘이 보내는 것에 대해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은 시기.

이런 게 썸일 텐데, 쇼핑 전에 이 물건이 우리 집에 도착해 물건을 뜯기 전 설렘, 사기로 했으니 보이지도 않는 별점 1개짜리(이 때는 별점 1개는 테러로 간주한다) 리뷰, 도착도 안 했는데 자리 배치는 어디로 해야 할까, 다른 필요한 건 없을까 고민하는 이 모든 프로세스가 거의 동일하지 않나 싶어.


썸 탈 때는 몰랐는데, 막상 사귀고 나서는 그 기대감이 와장창 깨지는 경우가 있지. 차츰 내가 알지 못했던 면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인 그 사람의 장점이 내게 상처를 준다거나, 관계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어.


포괄적으로 보면 이런 점에서는 여행 떠나기 전 세우는 여행 계획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지만 나는 여행 계획을 철저하게 시간에 맞춰 세우지는 않는 편이야. 아니, 세웠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한 거구나, 그건 여행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일거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계획을 철저히 세우지 않아. 어디는 꼭 봐야겠다, 어디가 맛있다더라, 아니면 어떤 루트로 가면 만족도가 높겠구나 정도의 정보를 수집은 하지만 요즘은 이 것도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싶어.


여행을 계획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대감이 너무 높아지더라. 그 많은 리뷰들을 보고,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간 빵집은 결국엔 한국에 있을 때 동네 파리바게뜨 빵보다도 못 한 경우도 있었고, 절경이라던 그 풍경은 나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어.

오히려 이런 계획 없이 걷다가 냄새가 너무 좋아 들어가게 된 식당, 간판이나 내부 분위기가 정말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고 계속 손님이 있던 빵집, 그리고 지금 내 기분에서는 사람이 많은 곳보다는, 그 타워가 잘 보이는 곳보다는 궁상 좀 떨고 싶을 때 무작정 걷다 보니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한적한 강변. 이런 곳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의 평가, 추천보다는 지금, 내게 어떤 게 필요하고 어떤 감정이고, 내 판단기준이 어떤지를 알게 된 후에 내 여행은 좀 더 만족스러워졌던 것 같아.




기대감은 무언가를 할 때 큰 동기부여가 되지만, 기대감만으로 결정하는 건 아무 빛도 없는 깜깜한 방 안에서 저 멀리에 있는 기둥에 고리를 던져 꽂아 넣는 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운이 좋으면 그 고리가 잘 들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방안에 불을 하나씩 켜면 그 확률은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 불빛은 상황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이 될 수도, 이성적인 판단이 될 수도 혹은 지금 나 자신의 감정 상태도 될 수 있겠지. 이 모든 게 어려운 순간에서는 내 선택에는 작게든, 크든 어떻게든 책임이 따른다는 생각만 가지고 판단해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럼 또 글 쓸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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