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근길이나, 회사에서 음악을 들을 때, 처음 듣는 음악보다는 익숙한 음악들을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적당한 텐션감,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국내 힙합곡을 듣고 싶을 때는 항상 빈지노를 택했던 것 같다.
비록 지금은 '개인사업자 임성빈'씨로 활동하고 계시지만, 재지팩트 시절과 24:26 앨범 시절 음악을 들을 때면 그 둠칫 둠칫(아, 표현력의 한계) 비트에, 똑같지만은 않은 플로우와 매력적인 그 목소리며, 심지어 이것이 '청춘'이겠구나 싶은 가사는, 적어도 내게는 대체할 만한 래퍼가 없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끌리는 이유는 그때의 빈지노 노래를 듣고 있으면 대학생 때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빈지노 음악을 엮어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듣다 보면 종종 그런 댓글이 보이곤 한다. '지금은 30대지만, 빈지노 노래를 듣고 있으면 20대로 돌아간다.'라는. 나도 공감한다. 특히 'Nike Shoes'나 'Boogie On & On', 'Aqua man' 같은 음악을 들으면 대학생 때의 나로 돌아간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지만, 오늘 당장 놀아도 내일 별 큰일이 없던 그런 때로.
그때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봄 날이었고, 강의에 들어가기 전 점심시간에 공대 앞에 앉아있는데, 벚꽃이 흩날리고 하늘은 너무도 파랬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나는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장 그 풍경 아래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바로 동기와 후배들과 후문에서 캔맥주 몇 개를 사서 꿀꺽꿀꺽 마셨다. 나는 술을 마시면 티가 정말 많이 난다.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발그레지는 정도가 아니라, 조만간 이 사람은 터질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빨개진다. 그래도 그때는 창피한 줄도 몰랐고, 이게 청춘(靑春)이라고 생각했다. 푸를 청(靑)에 봄 춘(春).
당장 강의를 들어가야 하지만, 지금 내가 온전히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객기'를 부리는 일.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일들을 청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냥 단순히 객기였다. 20대이고, '우린 청춘이다'라는 슬로건 뒤에 숨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하지만 그때의 나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빈지노 음악을 들으면서, 그때 생각을 하면 그때의 나는 나름 말갛게 빛이 났었다. 비록 당장,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고 다가오는 미래에 불안해하고, 당장 오늘 내게 주어진 수많은 과제와 빨리도 돌아오는 중간, 기말고사에 항상 초조해해야 했지만(물론 초조해했을 뿐, 미리 준비하진 않았다.) 그때의 나는 오늘을 즐기는 데 있어서는 '아이의 마음'이었다.
감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생'이라는 시를 빌리자면,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들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 중
그때의 나는 그저 그럴 뿐이었다. 꽃잎을 주웠고 그 순간에 만족할 줄 알았던 것 같다. 미래를 걱정했지만 오늘 내리는 꽃 비 아래에서 캔맥주를 땄다. 그때 캠퍼스에 울려 퍼지던 빈지노의 Nike Shoes가 그 순간의 BGM이었던 것 같다. 같은 의미로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도 내게 그런 노래다.
헌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내가 그 시절을 추억하는 건 과연 그때가 지금보다 더 좋아서일까.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더 행복해서일까.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불안정했다. 당장 취업을 위한 스펙을 만들어야 하는데, 오늘은 이게 필요하다고 하고 내일은 또 저게 필요하다고 하니 준비할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나를 소개하는 자기소개서라도, 회사가 좋아할 만한 폼으로, 첨삭을 받아 깎고, 더하기도 하고, 매만져야만 했다.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는 합격 일지, 불합격 일지 모르지만 다음 단계인 인적성검사를 준비해야 했다. 사기업을 위해서는 각 회사별 인적성검사를 준비해야 했고, 공기업에서는 다시 NCS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운이 좋게 모든 걸 통과했다면 다음은 면접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당시에 광화문의 한 회사에서 인턴 면접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나 긴장할 수 있구나를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에서 충분히 외향적으로 보일만큼 나 자신을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자 긴장감은 나 자신을 공격했다. 예상된 질문이었음에도 횡설수설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나에게 당시에 정말 많은 실망을 했다.
그래서 면접을 준비할 때는 예상 질문에 맞는 예상답안을 뽑아놓고 정말 달달 외웠다. 문장 그대로 외우는 건 중간에 몇 자를 까먹으면 모두 꼬이기 때문에 핵심 단어를 표시해놓고, 그 핵심 단어만 잊어버리지 않게끔 준비했다. 특히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자기소개만큼은 매끄럽게 할 수 있도록, 친구에게 갑자기 물어봐달라고도 했다.
물론 이때 내가 준비했던 것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른 취준생들이 하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물론 지금은 모두 다른 형태로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도 나보다 더 준비를 하면 더했지, 덜 하는 친구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너무도 많은 불합격했다는 메일에 어느샌가부터 아쉬운 마음도 안 들 때쯤에는 불투명한 미래에 힘이 들었고, 나는 자꾸만 미끄러진 취업길에 이미 취업을 한 동기들을 볼 때면 마음이 조급해졌던 게 사실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보다 먼저 취업했던 친구들 중 퇴사도 나보다 먼저 한 친구들이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나름 열심히 준비한 회사를 1년 조금 넘게 일하고 퇴사했고. 친구들 중에 한 친구는 미국으로 떠났었고, 한 친구는 제주로 떠났었다가 다시 돌아왔고 어떤 친구는 결혼을 했고, 저 친구는 취업이 어렵겠다 싶었던 친구마저도 취업을 해서 잘 살고 있다. 그때 고민하고, 불안했던 모든 것들은 취업을 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이라고 미래가 모두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당장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원래 인생은 그런 거니까'라고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고, 그런 현실에 불안해지기보다는 이제는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다고 느껴진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는 그들만의 '빈지노'가 있고 그 BGM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나를 느낀다면, 또 몇십 년 뒤에 지금의 나를 떠올리는 음악은 어떤 곡이 될지 궁금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