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q mark Dec 12. 2021

독일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독일에 첫 발을 내디딘 게 2017년 11월이었다. 지금이 2021년 12월이니, 벌써 4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나는 독일에 살아도, 독일인과의 교류가 많은 것도 아니고(사실, 독일인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교류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독일인들만의 사회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나름 대도시에 살다 보니 인프라도 잘되어있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가끔씩 언어로 인해 불편을 느끼기는 하지만, 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정말 불편하다는 생각은 거의 못 느끼고 살고 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더더욱 길어진 친구들과의 만남,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정서적인 교감을 제외하고 말이다.



 다만, 며칠 전 '아, 그렇지. 내가 외국인으로서 여기 살고 있구나'라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낀 일이 있었다.

 바로, '거주 허가증(Aufenthaltstitel)'을 갱신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칭 '비자'라고 하는 이 자그마한 카드를 처음 발급받을 때도 한없이 느린 처리 시스템과, 약속을 잡지 않고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만 공무원을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속도'에 정확히 반대되는 속도로 진행되는 일처리에 지치고, 힘들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여권 만료일이 내년 1월이었기에, 처음 발급받았던 비자 기간도 여권 만료일까지였다. 이번 비자 갱신 때는 기필코 내가 먼저 빠르게 움직이겠다는 마음으로 여권도 미리 재발급받고, 여권을 받은 다음에는 외국인청(Ausländerbehörde)에 미리 메일도 써가며 그냥 갱신이 되는지, 아니면 새로 신청인지, 여권 재발급받았는데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도 미리 물어가며(물론 메일에 대한 답은 여유 있게(...) 받을 수 있었다.) 12월 초로 공무원과의 약속도 잡아두었다.


 준비해야 할 서류는 총 13개에 달했고, 워낙에 집 정리든 서류 정리든 못하는 탓에 여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하나, 둘씩 서류를 준비하고 체크하며 약속된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전 날 저녁 마지막으로 빠진 서류는 없는지 한번 더 체크하고, 머릿속으로는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했다.

 역시 가장 문제는 나의 독일어였다. 독일어로는 가장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주문, 계산 등의 일상적인 문장은 큰 무리 없이 가능했지만, 독일인, 그것도 법보다 위에 있다는 독일 공무원을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Entschuldigung, Mein Deutsch ist nicht gut. Können Sie Auf Englisch sprechen?"

 (죄송합니다, 제 독일어가 엉망이에요. 혹시 영어로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젭라ㅠㅠㅠㅠ")


뿐이었다.


 사실 비자를 처음 발급받을 때는 이렇게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서 Ja(네)만 주야장천 대답하다가 왔었는데 이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아예 모르고 맞으면 아픈 줄 모르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독일 공무원을 거슬리게 했다가 쫓겨났다는 썰 등을 살아가며 듣다 보니 괜히 겁이 났다.

 꼭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는 '아, 그동안 독일어 공부 안 하고 뭐했냐, 나란 자식.' 등의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들 어쩌겠나, 당장 내일인데.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오전 업무를 끝마치고 외국인청으로 향했다. 일을 하는 오전 내내, 그리고 향하는 시간에도 머릿속은 복잡했고, 마음은 무거웠다. 이성적으로 '내가 세금을 안내는 것도 아니고,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 아는 건 없어서 받아가는 것도 없는데 나라에서 보면 1등 시민 아닌가. 내가 쫄게 뭐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감정적으로 이미 내 속은 까맣게 타고, 그 탄 재마저 탈탈 털리고 있었다.


 가자마자, 코로나 때문인지 혹은 점심시간이 막 끝나서 그런지 사람들은 줄 서 있었고, 나도 줄을 섰다.

 그런데 입장하기 전 내 바로 앞에서 두 번째 민원인 분과 보안직원분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줄 서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왜 들여보내 주지 않냐는 민원인과 지금은 코시국으로 예약한 사람만 들여보낼 수 있다는 직원분의 실랑이였다. 결국에 그분은 줄에서 이탈하시고 다시 입장하기 시작했지만, 가뜩이나 긴장한 나는 더더욱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그분은 내가 대기하는 동안 잘 해결되셨는지 다시 들어오시는 걸 보았다.)


 평소 내 톤보다 두 단계는 ('아 -'(파), '아 -'(파 #),  '아 /'(라). Okay ) 높인 목소리와 최대한 착해 보이는 눈빛을 장착했다. 보안직원분이 안내해주시는 대로 QR코드를 기계에 찍고 대기석에 앉아서 번호가 화면에 나올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안내에 시키는 대로 앉았다. 다른 직원분도 나를 보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웃어주며 말씀해주셨고, 나를 향해 웃어주며 말씀해주시던 그분을 보고 '오, 천사인가'라는 마음이 들며 아주 세상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에 가득 담고 "아, 저 너무 떨려요"라고 나도 모르게 말씀드렸다.

 그분이 미소로 화답하며 다른 곳으로 가시자, 나에게는 슬그머니 현타가 찾아왔다. 도대체 나는 왜 이리도 착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웃으며 대하는 게 틀린 게 아니라 오히려 잘하는 일이지만 그걸 왜 평소에는 하지 않고, 이 외국인청에 와서 하고 있냐는 말이다.



 현자 타임도 잠시, 내 번호가 화면에 올라왔고 그 옆에 적힌 담당자 번호를 찾아 들어갔다.

 서류 봉투를 잘 챙기고,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고 담당자분의 자리로 갔다. 인사를 하고, 앉아서 서류를 꺼내는데,


 "독일어 할 줄 아세요?"

 "조금이요. 쪼금."

 "영어가 더 나아요?"

 "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나라에 여행을 가면, 영어가 모국어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행을 하며, 티켓을 발권하는 곳이나, 키오스크 등 기계에 'English'로 언어 변경을 할 수 있을 때는 일단 내가 영어가 자신이 있든 없든 적어도 마음은 훨씬 든든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의 짐이었던 공무원과의 대화에, 가장 고민했던 독일어 대신 영어라니 마음속으로는 유레카를 외치고, 표정은 한결 밝아졌을 것이며, 심지어 그분에게 후광이 비추는 듯도 했다.

 서류를 모두 준비해 갔다고 생각했지만, 서류 하나가 더 필요했고 그 서류마저도 본인이 뽑아서 처리를 해주고, 모든 게 문제가 없으며 3년의 거주 허가증이 발급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끝으로 수월하게 처리가 되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마음이 커져, 혹시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겠냐, 어떤 방식이든지 당신을 칭찬하고 싶다. 사실 어젯밤부터 걱정이 너무 컸는데, 당신이 너무 친절하게 처리해줘서 무척 감사하다 등등의 말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가볍게 미소를 띠며 그럼 나가는 길에 민원 만족도 표하는 기계가 있는데 거기에 스마일 버튼 한 번만 눌러주면 돼 ^^. 

 정녕... 당신이 이 나라의 천사입니까.


 몇 번이나 노란 스마일을 누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진심을 담아, 내가 오늘 표한 감사가 그분의 업무 만족도에 보탬이 되길, 들숨에 행복이 날숨에 사랑이 가득한 평온한 삶이 되시길 바라며 버튼을 꾹 한 번 누르고 나왔다.



 날씨는 매우 추웠지만, 새삼 독일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내게 손뼉 쳐주는 것 같았고, 트램이 들어올 때 울리는 경적소리는 팡파르 같았다.


 나는 외국인으로서 이곳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하루였고, 다시 한번 따뜻한 인류애를 마음에 품게 되는 하루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걱정을 해봐야 소용없고, 그렇다고 준비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건 걱정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하루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