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교사가 맞지 않는 5가지 유형
'전부 다 하기 위해서는 전부 대충할 수밖에 없다' (https://x.com/kimsunpine/status/1760893235105542501?s=20)
교사라는 직업을 이렇게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오늘 SNS에서 이 문장을 보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은 사업 하지 마라', '이런 사람은 공무원이 적성에 안 맞는다' 따위의 글이나 영상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왠지 '이런 사람은 교사하지 마라'는 류의 매체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아직 5년 차지만 직장에서는 20년 차와 다름 없는 취급을 받는 내가 써 보기로 했다. 이름하야 '이런 사람은 초등 교사 하지 마세요'.
나는 멀티 태스킹이 참 안 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면 어느샌가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세상에는 나와 그 일만 덩그러니 남을 때가 많았다. 어른들은 그럴 때마다 '주위를 좀 살펴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잘 인지하지 못해서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무시하여 상처주는 경우도 있었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엉망이 되어 있는 방 풍경을 마주하기도 했다. 하나의 일이 끝나지 않으면 그 일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일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초등 교사란 어떤 직업인가. 그야말로 100가지 일을 한 번에 처리해야하는 직업이다. 평범한 초등 교사의 일상은 이러하다.
8:10 출근
8:10~8:40 등교하는 학생에게 인사, 아침 활동 안내, 과제 검사, 가정통신문 수합, 학급 SNS 확인, 메신저 접속
8:40~8:50 지각 학생 집에 연락, 메신저 확인, 수업 자료 확인
8:50~9:00 전달 사항 공지, 시간표 확인, 개괄적인 수업 활동 안내
9:00~12:10 오전 수업 (수업하는 틈틈이 공문 확인, 쉬는 시간엔 학생 상담 및 다음 수업 준비)
12:10~13:00 점심 시간(을 가장한 급식 지도, 잔반 검사, 오전 수업 중 문제 행동 일으키거나 다툼이 있었던 학생들 상담)
13:00~14:30 오후 수업
14:30~14:40 알림장 공지, 가정 통신문 배부, 과제 미제출인 학생 남겨 과제 검사, 오후 수업 중 문제 있었던 학생들 상담
14:40~15:30 교과 보충 지도, 학년/전체 회의 참석, 공문 작업, 학급 청소
15:30~16:30 공문 작업, 다음 날 수업 준비
대략적으로 생각나는 일만 기록해보았지만 사실 이 일과표마저 아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은 한 학생을 상담하느라 며칠이 걸리기도, 학교 폭력이 터져 관련 서류를 정리해야 할 수도 있으며, 보호자의 민원 전화를 받느라 오후 시간이 날아가기도 한다. 처음엔 요령이 없어 이 모든 일을 정말 꼼꼼히, 세심하게 하다가 머리가 터져버릴뻔 했다.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하니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어야 다음 일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초등 교사를 하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저는 애들이 너무 좋아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게 됐어요~"
예전엔 '초등 교사=아이를 좋아한다'가 어떤 명제처럼 작용했기에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초등 교사를 할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사도 많다. 나 역시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교사 중 한 명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익숙한 몇 명의 사람들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선호한다. 낯선 사람이 많은 환경에 던져지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스몰 토크를 해야하는 상황을 피해 도망다닌다.
그런데 초등 교사는 매년 다수의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한다. 학생, 학생의 보호자, 동학년 교사, 운이 없으면 관리자까지. 적게는 30명 정도에서 많게는 70명 정도다. 이 사람들과 1년 동안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가깝게 지내야하고, 이 과정에서 수없이 부딪혀야 한다. 사실 이 과정도 버거운데, 더 웃긴 점은 이렇게 1년 동안 열심히 쌓아 왔던 관계가 1년 후 3월이면 또 백지장이 된다는 것이다. 일단 새로운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래포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과제인데, 이게 1년이 지나면 무슨 가위로 실을 자르듯 툭 끊어진다는 게 참 맥 없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사무실에서 내 업무만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는 최소화하고 싶은 내향형 인간에게는 '매일 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 빨리는 일이다. 이 기 빨리는 일을 매일 매일, 1년의 주기로 겪어야하니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면 초등 교사를 계속하기 어렵다.
나는 MBTI 검사를 하면 J 성향이 90%가 나오는 사람이다. 여행을 가게 되면 분 단위로 계획을 짤뿐만 아니라, 계획이 틀어질 경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급격하게 기분이 다운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렸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견딜 수 없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동안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분석하느라 버퍼링이 걸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린이라는 존재는 예측불가다. 자기중심적이고, 시야가 좁으며, 충동적인 성향이 강하다. 하고 싶은 일은 꼭 지금 해봐야하는 것이 어린이다. 하물며 한 명의 어린이도 다루기 힘든데 그런 어린이가 20명, 30명이 있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수업 시간에 문제 행동 하는 아이를 지도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주의집중시키고, 제대로 설명을 듣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활동 진행이 느려지면 내가 생각한 수업 진도 10 중에 5도 나가기 힘들다.
하루 일과 중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생길 경우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나의 계획대로 업무를 처리할 수 없다. 회의와 업무가 밀려있는데도 '쟤가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봐서 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단전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오늘까지 보내야 할 공문이 있는데 '우리 애가 숙제가 많아서 머리가 아프다는데, 숙제 좀 적게 내주세요'라는 민원 전화를 받고 있어야한다. 초등 교사에게 계획은 사치다. 어차피 계획 따위 세우기만 하면 된거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초등 교사에 적합하다.
'워라밸'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한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라고 대답할 것이다. 열심히 일한만큼의 보수나 결과가 따라야만 그 일을 사랑할 수 있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런 측면에서 교사의 워라밸은 어떨까?
앞서 말했듯 교사 한 명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업무가 주어진다. 학습 지도, 생활 지도, 학교 업무, 학년 업무, 나이스 작성,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등등 ...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일의 우선 순위를 매기기 어렵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일들이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지만 딱히 불이익을 얻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아무리 학습 지도, 생활 지도, 학교 업무, 학교 업무에 다른 교사의 몇 배의 시간을 들이고 정성스럽게 하더라도 대충 교과서로만 수업하는 교사와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력이 낮을 때 이것저것 의욕에 넘쳐 해보다가도 어느 순간 허탈해진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업하고 아이들을 돌봐도 돌아오는 건 자긍심이나 보람 정도다. 오히려 의욕이 과해지면 그것만으로 학생이나 보호자의 민원을 살 수 있다. 실정이 이러다보니 연차가 찰수록 점점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일한 만큼의 성과를 얻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직업인 셈이다.
초등 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배려? 친절? 사랑? 다 틀렸다. 바로 '운'이다. 아니 직업이 복권도 아닌데 운이 가장 중요하다니요, 하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사실 그 말이 맞다. 일이라는 것이 운의 여부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불합리한 일이 초등 교사의 세계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한때는 교실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한 명의 학생이 끊임 없이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그 학생/교실을 맡은 담임 선생님의 자질을 의심했다. '나라면 이렇게 지도할텐데', '이렇게 말했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같은 꽤 오만한 생각도 했더랬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음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학급이 있었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분필을 던져도 민원이 없는 학급이 있었다. 연차가 찰수록 학생이나 학급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담임 교사에게 따지는 것이 불합리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한 해 업무의 성공과 실패가 1년이 시작하는 학급 편성 시기, 제비 뽑기로 정해지다니. 이게 게임이라도 100% 운의 여부에 따라 캐릭터 육성이 성공하고 실패한다면 망겜이라고 욕 먹고 사라질텐데, 안타깝게도 한국 초등 교육계에서 이런 관습이 사라질 날은 오지 않을듯 하다. 그러므로 가위바위보를 못하거나, 제비 뽑기를 했을 때 어쩐지 '꽝'만 뽑았던 사람이라면 초등 교사는 하지 않는게 상책이다.
오늘 아침 산책을 하다 김밥집에 들렀다. 사장님 부부가 너무 행복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는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 내 직업에 만족한 적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게 됐다. 쓰면 쓸수록 내가 초등 교사에 안 맞는다는 확신만 강해지는 것 같다. 교대 진학을 희망하거나 초등 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꼭 이 글을 읽어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길. 세상에는 더 좋은 직업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