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엔 항상 '10년 후/20년 후의 나 상상하기' 같은 방학 숙제가 있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30대란 '모든 업적을 달성한 어른'이었다. 20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에는 취업을 해 30대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고 내 명의의 집과 차를 소유한 유명인이 되었을거라 굳게 믿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행복한 어른의 삶'에는 결혼과 출산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멋진 배우자와 귀여운 딸을 두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수능을 마치고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한 살을 더 먹었을뿐인데 주위의 시선과 태도는 180º 바뀌어버렸다고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의 스무 살이란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어른으로 취급해주지는 않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참 불친절했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 성적만 좋으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회는 아니었다. 일을 잘하거나 성적이 좋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나를 봐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타인과 어울리는 것이 서툴고 요령이 없는 나로서는 튜토리얼 없이 본 게임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조작법도 모르는데 적을 맞닥뜨린 느낌.
무엇보다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 두려웠다. 10여 년을 학교가 만들어 놓은 커리큘럼만 따라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한다니. 겁도 많고 깡도 없었던 나는 학창 시절에 했던 것처럼 소극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갑자기 남아나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할지도 몰랐다. 주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운동에 도전할 때, 나는 집에 처박혀 있었다. 잘 노는 법도, 잘 쉬는 법도 몰랐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20대가 청춘이다 따위의 말을 할 때마다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20대의 나는 사방이 어둠뿐인 공간에 혼자 갇혀 있었던 거 같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이 앞이 낭떠러지일까봐 너무나 무서웠다. 대학 생활에 실패하고, 고시 공부를 하며 나의 한계를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과하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돌이켜보면 언제나 너무 과하거나 부족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 애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묘하게 미래 지향적인' 나는 빨리 30대가 되고 싶었다. 10대 때는 가정의 일이나 공부로 힘들 때면 20대가 되어 나의 두 번째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기대하며 버텼다. 막상 20대가 되니 그렇게 즐겁기만 한건 아니었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30대는 이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중반쯤부터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얼른 30대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서른이 되었다. 이제야 출발선에 선 기분이다. 작년부터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도전하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궤도에 올랐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또 기대한다.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 몰랐던 10대보다 나의 약점을 알게 되었던 20대가 더 나았듯이, 나의 약점을 인정하지 못했던 20대보다는 나의 약점을 받아들이게 된 30대가 더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12살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른이 되지는 못했지만, 어른이 되기 위한 새로운 한 발자국을 크게 내딛는 30살이 될 것이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