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차
스위스 취리히 두 번째 날. 오늘은 일요일이고 비가 안 오니 비가 내리던 어제와는 좀 다른 풍경들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오늘의 첫 일정은 리트베르크 공원. 호스텔에서 전철 3분 타고 걸어서 7분이면 도착하는 공원.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웃음이 났다.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웃었다. 무슨 공원이 이리도 평화로운지. 아이와 엄마가 배드민턴을 치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어떤 이는 돗자리를 펼쳐놓고 낮잠을 잔다. 나도 그 옆에서 자고 싶을 만큼 너무 편해 보였다.
유럽과 우리나라 공원의 차이는 확연하다. 우리나라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 공원을 찾지만, 유럽 사람들은 공원에 운동을 하러 그리고 쉼을 찾으러 온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공원은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공원이 들어오는 느낌이라면, 유럽은 공원을 중심으로 단지가 형성이 된 느낌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혹시 내가 틀린 추측을 했다면, 댓글로 나의 주장을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리트베르크 공원의 일요일 풍경. JPG
리트베르크 공원에 있는 리트베르크 박물관에도 다녀왔다. 취리히 카드로 좀 저렴하게 입장했지만, 그래도 비싼 스위스의 물가. 스위스에서는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일까. 박물관 직원이 한국인 룸메이트가 있었다며 나에게 서툰 한국말을 하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관광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다. 관광객의 모국어로 이야기해주는 것. 친절하고 유쾌한 직원 덕분에 웃으면서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
리트베르크 박물관은 일본, 인도, 아프리카 작품들이 주로 있다. 일본, 인도, 아프리카 관련 유물과 작품들을 이미 대영 박물관에서 보고 와서 그런 걸까. 난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입장료가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독자 중 취리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일본, 인도, 아프리카 문화에 정말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리트베르크 공원은 추천하지만, 박물관은 추천하지 않는다.
리트베르크 박물관을 다 보고 공원에서도 나왔다. 그러고 향한 곳은 리트베르크 공원 바로 옆에 있는 벨보아르 파크. 리트베르크 공원은 숲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벨보아르 파크는 도시 속에 있는 공원 같이 느껴진다. 벨보아르 파크에는 작은 연못에 사는 오리들에게 먹이를 주는 노부부, 어린 아기를 데리고 피크닉 온 취리히 사람들이 있었다. 힐링하는 그들을 보고만 있어도 자연스레 힐링이 된다. 취리히가 그런 도시인가 보다. 남이 힐링하는 것만 보아도 힐링이 되는 도시. 자식 밥 먹는 것만 보아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벨보아르 공원의 일요일 풍경. JPG
벨보아르 공원을 둘러보고 향한 다음 취리히 호수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벌써 수영을 한 뒤 그늘에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햇볕에서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내 22년 인생 통틀어 가장 여유로운 주말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취리히 호수에는 요트가 정말 많다. 역시 1인당 GDP 가장 높은 국가라 요트라 이렇게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에는 노를 젓는 사람들, 요트 혹은 관광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이용해도 물이 깨끗하고 청량해서 너무 보기 좋았던 취리히 호수. 나도 다음에 오면 호수에 들어가서 수영해야지. 아 근데 그전에 수영을 배워야 호수에서 수영을 하겠구나...
취리히 호수 풍경. JPG
취리히 호수에서 시내 중심 쪽으로 걷다 보면 Rentenwiese공원이 나온다. 여기에는 앞서 소개한 두 공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태닝 천국인 공원. 사람들의 살색이 가장 많이 보이는 공원이 이 공원이다. 태닝 오일을 바르고 태닝을 하는 사람들. 누구는 정자세로 눕고 누군가는 엎드려 눕는다. 나도 다음에 오면 태닝 오일 바르고 태닝 한 번 해봐야겠다. 근데 이미 까매서 태닝 할 필요가 있을까?
Rentenwiese 공원 풍경. JPG
다음 일정으로는 피파 박물관에 갔다. 이번 취리히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한 피파 박물관. 박물관 식당에서 치킨 너겟에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로 배를 채우고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 피파 박물관을 월드컵 역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모든 월드컵에 대한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실제 월드컵 트로피도 보았다. 생각보다 작았지만, 첼시 구장에서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관련 영상과 자료도 챙겨보았다. 2층에는 플레이스테이션도 있었다. 한 판 하고 싶었지만, 나처럼 혼자 방문한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월드컵 트로피 자석을 기념품으로 구매하고 박물관에서 나왔다.
피파 박물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잘 알려진 린덴호프. 린덴호프에서 취리히를 내려다보니 더 동화 속 마을 같아 보이는 취리히. 이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면서 살까. 이 도시가 동화 속 도시 같다는 건 모르고 살겠지. 그들은 매일 보는 풍경이니. 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린덴호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각자의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인 사진 촬영을 하고 취리히가 내려다 보이게 앉은 채로 10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번 여행 와서 가장 잘하고 있는 것 중 하나. 바로 멍 때리는 시간 가지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도시의 냄새, 소리를 느껴보는 것. 뇌를 쉬게 해주는 시간.
린덴호프에서 내려다본 취리히. JPG
저녁으로는 퐁듀를 먹으러 갔다. 비싼 스위스인걸 알지만, 그래도 스위스까지 왔는데 치즈 퐁듀 한 번은 비싼 돈을 내더라도 먹어보고 싶었다. 치즈 퐁듀에 빵과 감자 그리고 화이트 와인 두 잔. 돈이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빵과 감자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퐁듀에 찍어 먹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퐁듀를 처음 먹어본 곳이 스위스라는 것에 만족스러웠다. 취리히 카드로 디저트까지 먹고 나왔다. 너무 배불러서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움직이고 싶었지만, 노을이 지고 있었기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로스뮌스터 성당 앞에 가서 노을을 촬영하고 다시 린덴호프로 가서 야경 촬영을 했다. 취리히 야경은 내가 대했던 것보다 더 예뻤다. 사실 기대치가 너무 낮았다. 파리나 런던에 비하면 확실히 야경은 덜 하다. 호스텔로 돌아와 오늘 찍었던 사진들을 돌아본다. 동화 같은 도시에서 동화 같은 시간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
취리히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취리히의 야경. 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