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어린 시절, 학교는 내게 아주 커다란 세계였다. 그곳에는 점수(點數) 차도 있었지만 빈부(貧富) 차도 있었으며, 외모는 물론이고 키나 비만의 여부조차 비교 대상이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돈이 많지 않으면 힘이라도 세야 했고, 그것도 아니면 축구를 잘하거나 노래라도 잘해야 했다. 모든 건 내 힘으로 해결해야 했지만 잘 사는 집안의 아이들 몇 명 외에는 다들 비슷한 처지라 우리는 서로 부대끼면서 사회성을 익혔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처음으로 가출을 생각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이야 갑자기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나,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둘째고, 우선 집을 나가면 숨통이라도 트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출을 하겠다는 생각은 학교라는 벽에 막혀 결국 접고 말았다. 이유는 하나, 가출을 하면 좋아하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으니까. 당시는 신문사 주최의 고교 야구대회만 해도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대통령배 등이 있을 정도로 고교 야구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보성고는 야구뿐만 아니라 유도, 아이스하키 등의 종목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응원을 갈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야구는 고교 대회지만 토너먼트를 거치며 위로 올라갈수록 TV 중계방송까지 나오니 전국의 모든 학교가 재학생, 졸업생까지 동원해 응원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로 응원 부원이었다. 가출과 학교는 애초부터 바꿀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학교라는 곳은 무언가를 배우는 장소이자, 무엇이 될까?를 꿈꾸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항상 꿈의 시작은 학교였다. 학창 시절이 그리운 건, 친구들과 보냈던 풋풋한 시간도 그렇지만 꿈을 꿀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학교에서는 입학을 해도 시작이고, 졸업도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일 뿐이다. 심지어 나이 들고 다니는 ‘인생학교’조차 새로운 시작을 얘기한다. 무언가를 꿈꾸고 도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학교, 그래서 나는 시작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학교’라는 단어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나이 들어 다니는 학교가 좋은 이유는,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대체로 ‘인생학교’나 이와 유사한 타이틀을 걸고 운영되는 중장년층을 위한 교육기관에는 나와 비슷한 ‘피 끓는 청춘(靑春)’들이 많다. 나이도, 성격도 제각각인 것처럼 해온 일도, 하는 일도 정말 다르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움과 관련해 사통팔달의 정보를 가진 고수를 만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교육 과정을 통해 동기(同期)가 되어 함께 크고 작은 일을 도모하다 보면, 전 직장의 기억은 사라지고 새로이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 어쩌다 걸려오는 직장 동료의 안부 전화를 받게 되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돈 되는 일도 없는데 뭐가 이렇게 바쁜 줄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고교 시절 그렇게 하기 싫었던 영어와 수학, 물리나 화학 등이 아니다. 이건 개인 차가 있으니 위에 열거한 과목에 신경 쓰지 말자. 그냥 나는 점수가 좋지 않은 과목은 무조건 다 싫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호기심도 바뀐다. 학창 시절에 그렇게 싫었던 과목도 여행이나 출장 때문에 친근해지기도 하고, 도대체 내가 사는 이 행성이 언제까지 안전하게 존재할 것인지, 우주라는 건 무엇이고 과연 신은 존재하는 건지 등도 궁금해진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주변의 또래도 갑자기 주역(周易)에 관심을 갖거나 죽음이나 명상 등에 필이 꽂히는 사람들이 있다.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게 진짜 공부다.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학창 시절에는 왜 그렇게 질색했는지 모르겠다. 퇴직하고 시간도 많아진 이제 진짜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며 인생 후반을 설계해보자.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나?
학교에서 다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