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상 살기

길 위에서

by 김영창

연륜(年輪)이란 말은 깊이가 있으면서 무게감도 느껴진다. 둥근 바퀴의 모양과 구름의 형상(形像)으로 긴 세월을 표현하면서, 한 분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상징하는 연륜 앞에는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웬만한 나이의 사람이 아니면 연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삶의 궤적도 그렇지만 축적된 시간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둥근 원 안의 쳇바퀴에 가둘 생각을 했는지, 생각할수록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의 바퀴가 굴러 또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되었다. 아마 한국에 사는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전쟁으로 폐허화된 나라에서 태어나 농경사회를 거쳐 산업사회로, 지식경제 시대를 거쳐 4차 산업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과정 하나 빠짐없이 다 거치며 살아왔다.


무슨 세상이 그리도 빨리 바뀌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지만, 그래도 쫓아가겠다고 기를 쓰고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의 나이가 되었다.


"왜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 모든 것을 다 겪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그건 그래도 행복한 고민이다.


한여름에 밥이 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밥공기를 비닐로 싸서 찬물에 담가 놓던 사람이 대부분이던 시절을 지나 김치냉장고까지 두고 살며, 저질의 대명사였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한류와 함께 세계 시장을 누비고,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 서울 명동 거리를 가득 메우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약삭빠른 상인과 가격을 흥정하며 진을 빼야 했던 지난날은 발달한 IT 기술 덕에 소비자 우위의 시대로 바뀌었고, 대중교통 역시 출발과 도착 시간까지 예측 가능한 신세계를 살고 있다.


나는 기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직업을 가졌기에 살아오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방송 장비가 하나 둘 바뀌기 시작하더니 불과 몇 년만에 촬영, 저장, 편집, 송출 등의 영역이 모두 디지털 시스템으로 바뀌었고 업무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영원히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쪽의 생리이기 때문에 대책을 세워야 했고, 결국 회사가 도입한 편집 프로그램에 맞는 컴퓨터(매킨토시)를 구입해 공부를 시작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동안 손을 놓고 산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역시 기계는 기계다. 대학 시절부터 생활의 도구처럼 컴퓨터를 사용하다 들어온 젊은 후배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방송과 관련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밤을 새워 가며 편집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한 그때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면 상대방도 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둘째고 방송 직전까지 방송과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면 상대방도 알고 나도 안다. 단지 서로 말을 안 할 뿐.


나도 아날로그 시절에는 제법 한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한 상대방의 기대가 무서웠고, 자신 없는 내 속마음을 들키는 것은 더 두려웠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쫑파티’를 즐기게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를 통해 얻은 것도 적지 않으니 그간의 마음고생이 헛된 시간은 아니었던 셈이다.


디지털 세상은 지나온 시기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에서 안도감으로 호기심에서 기대로 그리고 희망으로, 지금까지는 발전적이었지만 또 모르겠다. 세상이 늘 그렇듯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오르내리는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어릴 적, 날이 몹시도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친구의 집에서 처음 먹어 본 차가운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었다. 냉장고 속의 김치는 놀라운 기술이었고, 그렇게 맛본 기술이 이제는 세상을 바꿔 놓았다. 디지털 세상이 낯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껏 걸어온 길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가보지 않은 길은, 언제나 낯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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